[특파원칼럼/박형준]‘마쓰시로 대본영’보다 못한 日 사도 광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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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동원 포함 전체 역사 보여줘
불편한 역사 눈감은 사도 광산과 대비

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2020년 8월이었다. 일본 도쿄의 살인적인 무더위를 피해 겨울 올림픽이 열렸던 나가노현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숙소에 도착해 지도를 받아보니 승용차로 5분 거리에 ‘마쓰시로 대본영(전쟁 때 일본군 최고지휘부)’ 지하호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 군부는 ‘본토 결전’을 준비하며 도쿄의 주요 시설을 옮기기 위해 나가노에 땅굴을 파 지하호를 만들었다. 도쿄의 대본영과 정부 기관, 왕실 등을 옮기고자 했다. 총 길이 약 10km인 지하호 건설에 조선인 노동자 7000여 명(추정)이 강제로 동원됐다.

‘섬뜩한 이곳을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들에게 보여줘도 되나….’

고민되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다음 날 지하호를 찾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에 심어진 무궁화꽃이었다. ‘모금을 통해 (조선인) 희생자 고향의 무궁화와 개나리를 심었습니다.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란 안내문도 있었다. 바로 옆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평화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의외였다.

더 놀란 것은 나가노시가 세운 안내판 문구였다. “노동자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강제로 동원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아름다운 일본’을 외치며 가해(加害) 역사 지우기에 한창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안내판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결정적 역할을 한 이는 나가노 현지의 일반 시민들이었다. 나가노슌에이고교 학생들은 1985년 미군과 일본군이 참혹한 전쟁을 벌인 오키나와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고향에 있는 지하호를 주목했다. 학생들은 1986년 ‘고향연구반’이란 클럽을 만들어 시 측에 지하호 공개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결국 시는 1990년 지하호 일부를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학생들은 주말이면 지하호 개요,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 등을 설명하는 자원봉사를 한다. 참혹한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주장하고 있다.

나가노현단기대학 교수였던 시오이리 다카시(염入隆) 씨는 1991년 조선인 희생자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4년 뒤 추도비를 설립했다. 비문에는 ‘식민지였기에 조선에서 강제연행돼 식량 부족, 낙석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며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이들은 기념비 건립 후 매년 추도식을 열고 있다.

2년도 더 지난 기억이 떠오른 것은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 광산’ 때문이다. 니가타현과 사도시 측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금(金)을 생산한 귀중한 유산”이라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 노동자 최소 1411명이 강제동원 됐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 등재 원칙 중 하나로 ‘완전한 역사(full history) 반영’을 들고 있는데, 사도 광산은 그 기준을 충족한다고 보기 힘들다. 2월 1일까지 일본 정부가 추천 여부를 최종 판단한다.

“일본인의 역사 인식은 아시아 국가로부터 자주 문제시된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침략, 가해의 역사를 충분히 검증해 사죄할 것은 사죄하고, 전후 보상을 성실하게 했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의 주장이 아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시민단체 ‘마쓰시로 대본영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이 2019년 1월 발행한 팸플릿 첫 페이지에 넣은 문구다. 불편한 과거에 눈감지 않는 일본 정부의 판단을 기대한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마쓰시로 대본영#일본#사도 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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