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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인생의 즐거움 찾아 나빌레라[라이프&드라마/박생강]

박생강 소설가·대중문화칼럼니스트
입력 2022-01-07 03:00업데이트 2022-01-0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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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빌레라’에서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뒤 발레를 배우게 된 ‘덕출’을 연기한 박인환(앞)과 발레 선생님 ‘채록’을 연기한 송강. 새해, 권태로운 일상을 단비처럼 촉촉히 적셔줄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찾아보면 어떨까. tvN 제공
박생강 소설가·대중문화칼럼니스트
새해가 밝으면 으레 올해의 목표를 세운다. 나는 예전부터 그런 건 좀 빤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2022년 새해는 좀 달랐다.

생각의 변화는 지난해 말의 어느 날 급성 위염에서부터 찾아왔다. 나는 쓰린 배를 움켜쥐고 작은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는 진료를 기다리는 많은 노인이 시름에 잠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서울 한복판 이태원 인근에 이렇게 시골 보건소 같은 병원이 있었나?

다행히 급성 위염은 하루 만에 좋아졌지만 그날의 쓰린 기억은 그대로였다. 수타면 반죽하듯 위를 퍽퍽 쳐대는 통증 때문에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그 기분. 나는 그렇게 엉망으로 새해를 맞이하긴 싫었다. 그래서 2021년 마지막 날에 ‘앙리 마티스: LIFE AND JOY’ 전시회를 관람했다. 내게도 위염의 기억 대신 즐거움이 필요해서.

드로잉처럼 섬세한 마티스의 판화도 기억에 남았지만, 그의 유명한 컷아웃 작품의 뒷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컬러풀한 유화로 명성을 얻은 마티스는 말년에 병상에서 잘게 자른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컷아웃에 도전한다. 주름진 손으로 가위를 들고 종이를 오리는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 시작한 도전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주변의 평가가 처음부터 환호였던 건 아니었다. 사실 유화로 명성을 얻은 그가 뒤늦게 왜 색종이나 자르고 있는지 의아해했을 뿐. 혹시 이 영감이….

대가 마티스도 이런 시선을 받았는데, 평범한 노인들의 특별한 도전은 오죽할까. tvN 드라마 ‘나빌레라’는 은퇴한 집배원인 평범한 일흔 노인 심덕출의 발레 도전기다. 덕출은 알츠하이머 판정 이후, 우연히 발레리노 채록의 연습 장면을 보고 중대한 결심을 한다. 바로 기억을 잃기 전에 발레를 배우는 것.

덕출은 주변의 비웃음과 가족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채록의 레슨을 받으며 발레를 배워간다. 알츠하이머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삼키기 전에 마지막 인생의 아름다운 동작들을 몸과 마음으로 익히려고, 그렇게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러나 덕출은 알츠하이머 악화로 마지막 순간 채록과의 공연을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채록의 응원에 함께 무대에 오른다. 알츠하이머가 새로운 삶에 도전한 덕출의 즐거움까지 빼앗지는 못한 것이다.

‘나빌레라’는 노배우 박인환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박인환은 1980년대 KBS ‘왕룽일가’ 이후 옹고집쟁이 아버지 역할의 대표가 됐다. 박인환은 신구처럼 귀여운 노인이거나, 최불암처럼 부성애의 아버지상으로 사랑받지 못했다. 그는 늘 주말극과 일일극의 고집스러운 가부장을 도맡았다. 그런데 ‘나빌레라’에서 배우 박인환은 내성적이지만 섬세한 열정을 지닌 노인 덕출로 새로운 연기를 펼친다. 덕출은 자칫 우스꽝스러운 광대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박인환의 우아하고 섬세한 연기변신 덕에 발레리노 덕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캐릭터가 됐다.

이 노배우가 이렇게 부드럽고 여린 감수성을 지녔던가? 특히 덕출이 공원에서 청년들에 둘러싸인 채 기억을 잠시 잃는 장면은 명장면이다. 박인환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두려움과 떨림을 몇 마디 대사 없이 눈빛과 표정, 작은 신음만으로 생생하게 살려낸다.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의 연기는 빛났다. 채록이 해외로 떠난 뒤 3년 후 알츠하이머가 심해진 덕출. 그는 눈 내리는 기차 건널목 앞에서 한국에 돌아온 채록과 다시 만난다. 순간 기억을 찾은 덕출이 팔을 들어올리며 “날아올랐어?”라고 애틋하게 묻는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물론 박인환이 이 드라마에서 보여준 건 슬픔과 애틋함이 전부가 아니다. 무뚝뚝한 얼굴의 대표주자 박인환이 ‘나빌레라’에서 그려낸 일흔 발레리노 덕출의 환희에 찬 그 얼굴, 그건 너무 해맑았다.

전시회를 보고 나는 지인들과 조촐하게 2021년을 마무리했다. 우리의 대화는 늙어가는 것과 죽음, 인생의 두려움, 사회에서 느낀 패배의 감정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함께한 한 변호사가 이런 말을 했다.

“먼 훗날에 우리 인생은 누구나 죽음으로 끝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나요? 그렇기에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더 즐겁고 뜨겁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 인간은 원래 영생할 수 없는 존재다. 동시에 유한하고 두려운 삶 속에서도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존재다. 마티스의 색종이와 덕출의 발레처럼. 그래서 나도 2022년 새해 첫날 계획을 하나 세웠다. 나를 들뜨게 해줄 소박하면서도(어쩔 수 없이 돈 많이 안 드는) 새로운 즐거움을 나빌레라 찾아보기로.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글 쓰는 내내 옆에서 알짱대던 호랑이 닮은 고양이들을 바라본다. 너네 혹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니?

박생강 소설가·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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