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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나도 막노동 하지만”…엄마 빚 5000만원 떠안은 9살에 ‘도움의 손길’

입력 2022-01-01 03:00업데이트 2022-01-0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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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빚 떠안은 하정이 사연 보고 “아이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 잘못”
시민들-의원실 도움 문의 이어져… 靑도 “대통령에 비중있게 보고돼”
빚 대물림 방지법 입법 여론 커져
“하정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저 역시 현장에서 막노동하며 살고 있지만… 어떻게 자기 빚도 아닌 엄마의 빚 5000만 원을 물려받은 아이를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2시경 동아일보 독자센터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경기 시흥시에 사는 방왕수 씨(61)는 이날 본보에 실린 ‘빚더미 벗어난 아이들’ 기사를 보고 용기 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하정이(가명·9)는 3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생전 대부업체 8곳에서 빌려 쓴 빚 5000만 원을 물려받았다.

방 씨는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어른의 잘못인 만큼, 돕는 것은 어른의 책임 아니겠느냐”며 “저 역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큰 도움은 줄 수 없지만 하정이가 살아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물품을 주고 싶다”고 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하정이의 변호인 측은 “따뜻한 관심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빚더미 아이들’ 기사를 보고 발 벗고 나선 어른들은 또 있었다. 본보 보도 후 사흘 만에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제도를 운영하는 대한법률구조공단(구조공단)에는 총 3건, 모두 5명의 아이를 빚에서 구제해 달라는 요청서가 접수됐다. 눈 밝은 지방자치단체 담당자들이 자기 일처럼 챙기고 나선 것이다.

각계각층의 관심도 이어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보도 당일 내부 회의에서 동아일보 기사가 비중 있게 보고됐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빚 대물림 방지대책을 지시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보고를 주의 깊게 들었다고 한다.

국회 행정안전위원장을 맡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실에서도 보도 당일 본보에 “우리가 어떤 법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문의해 왔다. 서 의원실 관계자는 “관련 민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라니 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시민들도 국회에 관련 법 처리를 촉구했다. 동아일보 온라인 기사에는 “미성년 빚 상속은 악법 중에 악법”이라며 “하루빨리 법을 손봐야 한다”는 댓글이 쏟아졌다.

시민들 “어른 잘못으로 아이 빚더미… 돕고 싶어”, 국회선 “빚 대물림 방지법 통과에 힘 보태겠다”
최근 5년 파산신청 미성년자 80명… “성인돼 결정할 수 있게 법 바꿔야”


지방자치단체에도 빚더미 아이들을 구제해 달라는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29일 오전 11시경 경북 영천시 동부동 행정복지센터에는 한 40대 남성이 방문해 조카를 도울 방법을 물었다. 이 남성의 조카는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함께 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며 부모가 남긴 빚 수천만 원을 떠안은 상황이었다. 그는 복지센터 담당자에게 “그동안 방법을 몰라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며 “기사를 보고 조카를 도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센터를 찾았다”고 했다.

민원을 접수한 오혜림 주무관(31)은 “미성년 빚 대물림 방지제도가 시행된 줄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날 오전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민원인을 도울 수 있었다”며 “신청 서류를 안내했고 조만간 서류가 접수되면 구조공단을 통해 상속 포기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오 주무관은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사례를 발굴해 어린아이들이 빚을 물려받지 않도록 돕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법무부에 따르면 2016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미성년 80명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빚을 제때 처리하지 못해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한 해 많게는 21명, 적게는 2명씩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와 구조공단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성년자가 재산보다 많은 채무를 물려받지 않도록 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시행 중인 대책은 현행법에 따라 3개월 이내에 상속 포기를 하도록 하는 내용이라, 시기를 놓친 하정이와 같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 등에서 빚 대물림을 막는 법을 만들어 시행 중이다.

지난해 5월 본보가 ‘빚더미 물려받은 아이들’ 기획보도를 게재한 것을 전후(지난해 5∼7월)해 미성년자가 원천적으로 상속 재산보다 큰 빚을 물려받지 않도록 하거나, 성년이 된 뒤부터 특별한정승인 신청 가능 기간을 계산하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민법 개정안 4건이 발의됐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 한번 없이 반년이나 국회에 계류 중이다.

새해에도 20대 대통령 선거(3월 9일)를 앞둔 여야가 정쟁에만 몰두할 경우 빚더미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안이 기약 없이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변호사)은 “최소한 미성년자가 성인이 된 뒤 상속 포기나 한정승인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한 차례 기회를 더 주는 방향의 법 개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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