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보던 밤낮 겸용 시계… 땅속서 잠을 깨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위클리 리포트]서울 ‘피맛골’ 유물로 본 조선과학 이야기
세종실록 등장 ‘일성정시의’
무더기 유물 나온 인사동 피맛골… 기초 탄탄했던 조선 천문과학

세종 때 제작된 밤낮으로 사용 가능한 복합시계인 일성정시의 복원 모습.
세종 때 제작된 밤낮으로 사용 가능한 복합시계인 일성정시의 복원 모습.
《지난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천문과학기술을 실증할 유물들이 출토됐다. 앙부일구, 자격루 등 세종 대에 많은 과학 기기가 만들어졌지만 당대 실물은 전해진 게 거의 없었다. 이번 출토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과학기술을 들여다봤다.》

피맛골 유물로 본 조선의 과학기술

“처음에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밤낮으로 기상 상태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했는데, 이를 완성해 보고했다.”

세종실록 1437년 4월 15일 기록이다. 당시 조선에는 앙부일구, 자격루 등 해를 관측하거나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물의 양을 측정해 시각을 알려주는 기기는 있었지만 해시계는 밤에 사용할 수 없었다. 물시계는 수온이나 압력에 따라 물의 속도가 변해 측정 결과에 오차가 생길 수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국 주나라 관직 제도와 전국(戰國)시대 각 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유교 경전인 주례(周禮), 원나라 역사서 원사(元史)에 별을 이용해 시각을 측정했다고 적혀 있다. 세종은 밤에도 별을 보고 시각을 측정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실록에 기록된 일성정시의다. 낮에는 해시계, 밤에는 별시계가 되는 복합시계인 일성정시의는 당시 총 4개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전해지는 실물은 없었다.

○ 500여 년이 지나 발견된 일성정시의

지난해 6월 인사동 피맛골 유적에서는 일성정시의 부품인 세 개의 고리가 나왔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지난해 6월 인사동 피맛골 유적에서는 일성정시의 부품인 세 개의 고리가 나왔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지난해 6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피맛골 입구. 현재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내 유적’으로 불리는 이곳은 조선시대 사법기관인 의금부(義禁府) 등 중앙관청을 비롯해 상설 시장인 시전행랑(市廛行廊)이 있었던 한양의 중심지였다. 수도문물연구원 발굴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발굴 조사를 하고 있었다. 2020년 3월부터 진행된 조사였다. 이날 발굴팀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유물들을 발견했다. 절단된 채로 묻혀 있던 16세기 승자총통 1점과 소승자총통 7점을 시작으로 조선 15, 16세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번에 처음 발견된 부품들은 출토 당시 잘게 잘린 채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이번에 처음 발견된 부품들은 출토 당시 잘게 잘린 채 포개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총통 조각들 아래로 세 개의 환(環·둥근 고리)이 잘게 잘린 채 가지런히 포개진 상태로 발견됐다.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처음에는 어떤 유물인지 전혀 몰랐다”며 “조각들에 눈금이 새겨져 있는 것만 확인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눈금에서 천체 관측 기기인 혼천의(渾天儀)를 떠올린 발굴팀은 혼천의를 복원한 이용삼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명예교수에게 사진을 보내 자문했다. 사진을 본 뒤 연구원 수장고로 달려온 이 명예교수는 “이 실물을 확인하게 될 줄 몰랐다. 이건 세종 때 제작된 일성정시의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종실록은 “바퀴 윗면에 세 고리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별의 이동을 측정하는 고리),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해시계용 고리),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별시계용 고리)이라 한다”며 일성정시의 형태를 전하고 있다. 이번에 출토된 일성정시의 부품이 바로 세종실록에 나오는 세 고리다. 특히 바깥쪽에 있는 주천도분환과 가장 안쪽에 있는 성구백각환은 두 귀(耳)가 있다고 묘사돼 있는데 출토 유물의 모양도 이와 동일하다. 또한 성구백각환에 새겨진 100개의 눈금은 “100각(刻)으로 때를 정해 밤낮을 나눴다”는 실록의 기록과 일치했다.

○ 현대 과학 기술 수준 보유

일성정시의는 당시 천문과학기술의 집약체다.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본이던 사회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 변화 등을 살펴 시간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국가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또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던 유교에서도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이라고 일컬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성정시의가 제작되기 전 조선은 중국에서 전래된 천체 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간의(簡儀)를 변형해 이용하고 있었다.

혼천의와 간의는 윤일을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윤일은 우리가 세는 1년의 길이와 실제 1년의 길이가 달라 발생하는 오차다. 지구의 공전주기는 약 365.25일로 우리가 아는 1년의 길이인 365일보다 0.25일이 길다. 일성정시의는 주천도분환을 이용해 이를 해결했다. 주천도분환에는 4분의 1도를 기본 단위로 1461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이를 모두 더하면 365와 4분의 1도인데, 이는 당시에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일성정시의는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을 한 눈금씩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4년에 한 번씩 1일을 추가하지 않고도 윤일 오차를 방지했다. 이 명예교수는 “당시 조선에서 정밀하게 365와 4분의 1도만큼 정밀하게 눈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세종 때 독립적으로 창제한 일성정시의를 보고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 교수는 서양에도 이런 것은 없다며 극찬했다”고 말했다.

○ 천문 읽기, 국왕의 의무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이전까지 꾸준히 천문학을 연구하며 발전한 조선 과학기술이 있었다. 그 첫 시작이 1395년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하늘과 땅의 모습을 그린 천문도를 새긴 돌)이다. 1247년 중국 남송 시기에 만들어진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다. 1만 원권 지폐 뒷면에 새겨진 별자리 그림이다.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 조선 태조는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천문을 이용하고자 했다. 천문을 읽는 것이 하늘의 뜻을 받아 통치하는 국왕의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문도가 필요했다. 각석 아랫부분에 새겨진 글에 따르면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성에 천문도가 새겨진 돌 비석이 있었다고 전해졌지만 세월이 흘러 복사본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신원 미상의 인물이 태조에게 천문도 복사본을 바쳤다.

태조는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 등장을 고구려 계승자가 고려가 아닌 조선임을 하늘이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천문도를 돌에 새기라는 태조의 명을 받은 천문학자 권근(1352∼1409)은 별의 이동에 따른 오차를 고려해 기준이 되는 별 28수를 새로 관측한 후 돌에 새겼다.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북반구의 거의 모든 별자리가 표시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 천문학 발전의 근간이 됐다.

이후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과학기술이 꽃피우기 시작했다. 세종실록 1437년 4월 15일 기록에 따르면, 세종은 1432년 7월 독자적 역법 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예문관 대제학 정초(?∼1434), 예문관 제학 정인지(1396∼1478), 중추원사 이천(1376∼1451) 등을 중심으로 조선만의 천체 관측 기기를 만들 것을 명했다. 그 결과 1433년 이천과 장영실 등은 혼천의 제작에 성공한다.

1434년 7월엔 자격루(自擊漏·스스로 시각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만들어 경회루 남쪽 보루각에 설치했다. 자격루는 세 개의 항아리를 높이가 다르게 배치해 일정한 속도로 물이 수수호(受水壺·원기둥 모양의 물통)로 흐르도록 했다. 수수호에 물이 차오르면 부력을 이용해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무 막대가 떠오르면서 수수호 위쪽에 설치된 구슬방출장치를 건드려 구슬을 방출한다. 방출된 구슬은 자동으로 종, 북, 징을 쳐 시각을 알려준다.

인사동 피맛골 유적에서는 자동 물시계의 구슬 방출장치인 ‘주전’도 발견됐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물시계 부품이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인사동 피맛골 유적에서는 자동 물시계의 구슬 방출장치인 ‘주전’도 발견됐다. 기록으로만 전하던 물시계 부품이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피맛골 유적에서는 이러한 물시계의 구슬 방출장치인 주전(籌箭)도 발견됐다. 지금까지 물시계나 그 부품의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었다. 주전은 구멍이 엇갈려 뚫려 있는 형태였으며, 구슬이 방출되지 않도록 막는 원통 모양의 걸쇠도 함께 출토됐다. 오 원장은 “주전에 일전(一箭·화살)이라고 적혀 있어 신기전이나 화포 구멍이라고 생각했지만, 전(箭)의 용례를 찾아보니 물시계 눈금이 있었다”고 말했다. 학계 전문가들 역시 “주전 실물이 출토됐으니 여태까지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된 물시계도 수정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도 제작됐다. 안쪽 바닥 면에는 세로선 7개를 새겨 해가 떠 있는 시간인 묘시에서 유시까지(오전 6시부터 오후 6시)를 2시간 간격으로 표시했다. 세로선과 세로선 사이에 8개의 세로선을 그어 15분 간격으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했다. 가로선 13개로는 동지에서 하지까지 절기를 알 수 있도록 했다. 시계 안쪽에 끝이 뾰족한 막대를 설치해 햇빛을 받은 막대 그림자가 가리키는 선을 읽으면 시간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현재 서울 종로구 광화문우체국 부근과 종묘에 설치했다. 세종실록에는 “무지한 남녀들이 시각에 어두우므로 앙부일구 둘을 만들고 안에는 시신(時神·12지신을 이용한 시각 표시)을 그렸으니, 대저 무지한 자로 하여금 보고 시각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앙부일구를 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청은 “조선시대 천문과학기술의 발전과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 과학문화재”라고 평가했다.

○ 후대 과학 발전 이끈 세종 시대


세종 때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기들은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다. 성종 집권 시기인 1486년에는 일성정시의에서 해시계 기능만 분리한 소일영(小日影)을 만들었다. 창덕궁 어수당 앞 소일영이 그려진 그림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1728년 제작)을 보면 영조 때에도 소일영이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과학기술은 서양 과학이 조선에 전래되자 변화를 맞았다. 18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는 앙부일구와 달리 평평한 모양으로 만든 해시계다. 하루를 100각으로 나눴던 기존 방식을 96각으로 나눈 서양 역법을 받아들인 명나라에서 1636년 제작한 신법지평일구가 조선으로 전해졌고, 1713년 한양의 위도를 측정해 조선에 맞는 해시계를 다시 제작했다. 19세기에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평혼의(平渾儀)를 만들어 사용했다. 둥근 황동판 앞뒤에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의 별자리를 새겼다. 하늘에서 보이는 별자리와 동판의 별자리를 일치시켜 시각을 읽을 수 있었다.

조선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던 세종 시기 과학기술은 문헌으로만 전해질 뿐 현존하는 실물이 거의 없다.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조선 과학사를 실증할 수 있는 주요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을 기획한 이상백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사는 “일성정시의 손잡이가 구름 모양이라는 사실도 출토 유물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며 “후속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과학문명사 강의’(책과함께)를 발간한 신동원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옛날에도 과학기술이 한국 문명 발달의 원동력이었다”며 “우리 과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데 전통 과학의 창조성, 우리 과학자들의 집념과 열정이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000000000.
#세종대왕#시계#피맛골#유물#일성정시의#천문과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