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석호]콘텐츠의 품격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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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발품 판 현장 기록에 쏟아진 ‘좋은 공감’
진짜 저널리즘 성원한 독자들이 진정한 히어로

신석호 부국장
신석호 부국장
지난해 출범한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가족을 떠나 고시원에 은거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좀 걱정스러웠다. 보통 인터뷰나 르포도 아니고 그들이 사는 모습과 구구절절한 사연을 여러 장의 사진과 동영상, 그래픽으로 구성한 장문의 시리즈 기사와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페이지로 만드는 작업. 기획과 취재, 제작에 몇 달이 들어갈지 모르는 수고에 독자들이 얼마나 호응해 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해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증발’ 5회 시리즈 첫 보도가 나간 뒤 우려는 기우로 변했다. 기사와 멀티미디어 스토리텔링 페이지는 온라인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조회수도 많았지만 더 고무적인 것은 독자들이 이모티콘과 댓글로 드러낸 ‘공감의 질’이었다. 코로나19 1년 차, 다양한 처지와 공간에서 삶의 무게를 버티고 있던 독자들은 가정불화와 사업 실패 등으로 세상을 등진 주인공들을 응원했다. 다수가 “나도 증발하고 싶다”고 했다. 뉴스 콘텐츠 속 주인공과 감정을 공유하는 ‘좋은 공감’이었던 것이다.

삶을 마감하면서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장기기증자들과 가족의 사연을 다룬 히어로콘텐츠 ‘환생’ 7회 시리즈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2월 보도된 기사에는 “뉴스를 보고 댓글을 단 것도, 눈물을 흘린 것도 처음”이라는 격한 공감이 이어졌다. 치솟는 부동산 값에 내 집 마련의 꿈이 사라지고, 코로나19 방역으로 장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가족의 건강과 무사가 행복임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는 내용이 많았다. 저널리즘 혁신과 뉴미디어에 주는 언론상이 이어지고 있으니 언론계도 공감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좋은 신문 기사와 좋은 온라인 기사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틀렸다. 좋은 신문 기사는 좋은 온라인 기사다. 핵심 지표는 조회수가 아니라 ‘공감의 질’이다. 히어로콘텐츠팀의 경험에 따르면 좋은 기사에는 대략 네 가지 특징이 있다. 기자 여러 명이, 이슈의 현장에 가서, 구체적인 스토리를 심층 취재해, 다양한 사진과 그래픽, 동영상과 함께 보도하는 것이다. 저널리즘의 가치로는 ‘현장주의’와 ‘협업정신’으로 집약된다.

하루하루 벌어지는 이슈를 다루는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충북 제천의 한 사우나에 불이 나 무고한 이용자들이 화마에 삶을 잃었을 때, 여러 명의 기자가 직접 현장에 가서 각 층에 비상구가 막히고 먹통 소화기가 뒹구는 기막힌 상황을 고발한 기사(2017년 12월)가 좋은 사례다. 공동체가 지켜주어야 할 안전이라는 가치가 실종된 현장 기록은 지면과 온라인에서 독자들의 공분(公憤)을 이끌어 냈다.

‘좋은 공감’을 이끄는 콘텐츠에는 당연히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된다. 제천 화재 보도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몇 자 적은 많은 온라인 기사와는 품격이 달랐다. 히어로콘텐츠팀은 취재기자와 사진·영상기자, 멀티미디어 기획자와 개발자 디자이너 등 10명 안팎으로 구성된다. 취재 아이템에 따라 3∼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최근 온라인 공간에 값싸게 빨리 ‘나쁜 공감’을 노리는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기자들이 현장에 가지 않고, 협업하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떠도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야기들로 조회수나 올려보려는 것을 ‘클릭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쓰는 사람과 매체의 브랜드와 영향력은 물론 독자들과 언론계,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히어로콘텐츠의 오늘이 있게 한 주인공은 그런 가운데서 ‘진짜 저널리즘’을 알아보고 성원해준 독자들, 진정한 히어로들이다.

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
#콘텐츠#품격#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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