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원]성장 기회 찾는 한국 기업들,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답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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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DBR 사업전략팀장
김창원 DBR 사업전략팀장
2년 전 친환경 기업 비전을 선포한 오비맥주는 산더미처럼 쌓이는 맥주 찌꺼기가 고민거리였다. 맥주를 생산하고 남은 맥주박이나 효모, 알코올이 해마다 30t이 넘는데 고스란히 폐기물로 처리해야 했다. 요즘처럼 환경 감수성이 예민한 시대에 소비재 기업에 ‘친환경 기업’이라는 평판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내부에서 혁신의 길을 찾던 오비맥주는 궁리 끝에 맥주 부산물 문제를 해결해 줄 파트너를 밖에서 찾아 나섰다.

식품 업사이클 업체 리하베스트와 천연식물로 화장품 원료를 개발하는 라피끄는 이렇게 오비맥주와 인연을 맺었다. 리하베스트는 맥주 부산물로 밀가루보다 칼로리는 낮고 단백질과 식이섬유 함유는 월등히 높은 ‘리너지’ 가루를 개발해 에너지바, 시리얼 등으로 제품화했다. 친환경 기술 스타트업인 라피끄 역시 맥주 효모를 활용해 식물 소재의 기능성 화장품을 만들었다. 오비맥주는 두 스타트업의 기술 덕분에 애물단지였던 쓰레기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고, 리하베스트와 라피끄는 원료를 무상으로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원가를 크게 줄인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대기업이 필요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스타트업과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마련함으로써 모두 윈윈하는 상생모델을 만든 것이다.

스타트업에 대기업의 탄탄한 인프라와 풍부한 자금력, 방대한 네트워크는 사업 규모를 키우고 판로를 확장하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다. 2년째 이어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전례 없는 불확실성과 가변적 환경에 대처해야 하는 대기업으로서는 스타트업의 기술과 혁신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기회가 되고 있다.

아쉽게도 오비맥주와 같은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업 사례를 국내 기업 생태계에서는 자주 찾아보기 힘들다. 스타트업의 파괴적 혁신과 대기업의 풍부한 자원이 시너지를 내고 고차원적 콜라보로 이어지기보다는 대기업이 사회적 책임(CSR)의 일환으로 시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입체적이고 긴밀한 협업을 위해서는 대기업의 자유로운 투자와 인수합병(M&A)이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하지만 우리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투자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글과 같은 빅테크 기업과 기술 스타트업의 이합집산이 자유로운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대기업이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판단되면 추가로 지분을 투자하거나 인수합병으로 성장 기반을 확보한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상장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분 매각으로 엑시트한 뒤 또 다른 창업을 노릴 수 있어 서로에게 유리하다.

국내에서는 이 같은 실리콘밸리의 생태계가 작동하지 않는다. 스타트업이 계열사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온갖 규제의 대상이 되고 기존에 받던 세액공제 등 혜택은 줄어든다. 스타트업으로서는 대기업과 손잡을 유인이 사라지는 셈이다.

대기업의 무분별한 확장과 부의 편중이 우려된다는 게 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지만 실리콘밸리의 문법은 이미 글로벌 스탠더드가 됐다. 더 큰 협업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 생태계는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대기업으로서도 치명적이다.



김창원 DBR 사업전략팀장 changkim@donga.com


#성장 기회#한국 기업#실리콘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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