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간직한 채 생을 이별할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구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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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30〉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예감한 정원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고(왼쪽 사진), 이 사진은 실제 영정 사진으로 사용된다. 싸이더스 제공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예감한 정원은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고(왼쪽 사진), 이 사진은 실제 영정 사진으로 사용된다. 싸이더스 제공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 비로소 삶이 윤곽을 드러낸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에서 주인공 정원(한석규)은 텅 빈 운동장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자신 역시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하곤 했다. 조선 후기 문인 이양연(李亮淵·1771∼1853) 역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다음 시를 읊었다.




시의 제목은 ‘병이 위급해져(病革)’이지만 시인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한 자만시(自輓詩)로 후대에 애송됐다. 29회에 소개한 도연명의 자만시와 달리 자신의 삶과 죽음을 짧게 압축하고 있다. 시인의 삶은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 방황과 유람으로 점철되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아끼던 아들마저 앞세웠으니 그의 삶과 시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시인을 위로해준 것은 달뿐이었던 듯하다. 시인은 유독 달을 좋아했다(박동욱·‘눈 내린 길 함부로 걷지 마라―산운집’). 달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은 대상일 뿐 아니라(‘詠月’), 자신의 힘겨운 삶을 지탱해주는 등불이기도 했다(‘창然’).

영화 속 정원은 시한부 인생임에도 겉으론 담담해 보인다. 시인 역시 정원처럼 자신의 죽음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 고통스럽게 살아왔지만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음조차 끌어안으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이라고 왜 고뇌하지 않았겠는가? 시인도 “한 번 세상에 와서 한 번 사는 것, 태어나기 전과 뒤 어느 쪽이 편안할까?(一番天地一番生, 生後生前較孰寧)”(‘醉吟’)라며 혼란스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정원이 친구에게 자신이 곧 죽을 것이란 사실을 알리며 만취해서 파출소에서 울부짖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정원은 다시 찾아와 영정 사진을 예쁘게 찍어 달라고 조르는 할머니의 바람을 이뤄드린다. 그리고 얼마 뒤 담담히 자신의 영정 사진을 찍는다. 정원이 할머니의 영정 사진에 기울인 진심처럼, 시인도 타인을 장송하는 만시에 진정을 담았다. 시인이 친구의 죽음을 애도한 민요조의 만시에도 달이 등장한다(‘挽溪朋’). 자신을 위로해주던 달을 실컷 볼 수 있기에 마지막 길도 나쁘지 않다는 시구가 영화 마지막 정원의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그대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란 내레이션과 겹쳐진다. 세상도 죽음도 탓하지 않는 그들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歸天’)라고 썼다. 우리 역시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면 죽음을 통한 ‘마지막 성장’도 가능하지 않을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죽음#한석규#정원#8월의 크리스마스#병이 위급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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