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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패션 오셀로[간호섭의 패션 談談]

간호섭 패션디렉터
입력 2021-12-22 03:00업데이트 2021-12-2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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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버질 아블로를 추모하며
AP 뉴시스
간호섭 패션디렉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는 다른 비극처럼 인간의 감정과 관련이 깊습니다. ‘햄릿’은 욕정, ‘리어왕’은 오만, ‘맥베스’는 야망 그리고 ‘오셀로’는 열등감으로 인해 탄생했죠. 이는 ‘오셀로’의 원제목인 ‘베니스의 무어인, 오셀로의 비극’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오셀로는 무어인, 즉 흑인이었습니다.

‘오셀로’는 인자함과 용맹함을 갖춘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인종적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명문가 출신 아내 데스데모나가 수많은 청혼을 거절하고 그를 택하지만 오셀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인 베니스 공국 원로 브라빈시오가 왜 결혼을 반대했는지를요.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루이비통 남성복 아트 디렉터인 버질 아블로(사진)가 떠오릅니다. 아블로 이전, 1990년대 중반에도 유럽의 패션 브랜드들은 앞다퉈 영미권 디자이너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해 충격을 줬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패션계의 무어인, 흑인 디자이너가 루이비통의 디렉터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1990년대 영미권 디자이너가 필요했듯, 20년이 지난 세상에서는 아블로가 필요했습니다.

아블로는 본인을 ‘메이커(Maker)’라고 칭해 달라고 했습니다. 보통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터(Creator)’로 기억되길 바라는 디자이너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건축학으로 일리노이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분야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가 자란 시카고의 거리, 힙합, 그라피티 그리고 마이클 조던의 농구화 같은 것들에 말이죠. 그 관심은 힙합 뮤지션 카녜이 웨스트를 만나 앨범 디자인, 무대미술 등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2009년 LVMH그룹 내 럭셔리 브랜드 펜디에서 인턴십을 합니다. 특권을 내려놓은 채 정식으로 패션을 배웠습니다. 당시 월급은 500달러. 그는 당시 펜디의 최고경영자(CEO)였던 마이클 버크의 신임을 얻습니다. 하지만 파리 패션위크에서 생소한 흑인 디자이너는 철저히 외면받습니다. 반전의 반전으로 세상이 변합니다. 그가 사랑했던 문화가 속속 럭셔리 패션계를 잠식합니다. 중고 스니커즈 리셀 마켓, 스트리트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 비욘세와 리애나 그리고 웨스트 같은 흑인 스타들이 럭셔리 브랜드 모델이 됐습니다. 2018년 루이비통의 CEO가 된 버크는 160년 전통을 뒤집고 그를 디렉터로 영입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영감은 마르셀 뒤샹, 앤디 워홀이 보여준 역발상의 뒤를 잇습니다. 그가 ‘메이커’로서 재고 상품에 불과했던 40달러짜리 폴로랄프로렌 셔츠를 프린트해 550달러에 되팔았던 게 그렇습니다. 일찍 생을 마감한 점에서는 비극의 주인공 오셀로와 같지만 아블로는 열등감을 극복한 인생 승리자, 패션 오셀로입니다.


간호섭 패션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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