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베네수엘라 기자 A가 한국 대선판 본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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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직 권력의 포퓰리즘 폭주
민주주의 위기 투표함서 시작

박용 경제부장
박용 경제부장
10여 년 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열린 2주간의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베네수엘라에서 온 기자 A를 처음 만났다. 10여 개국에서 온 기자들은 일과를 끝내고 학교 주변 맥줏집에서 친분을 쌓고 각 나라 정보를 교환했다. 술값은 갹출했는데, 그때마다 A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중에야 정부가 외환을 통제해 달러를 넉넉히 들고 나올 수 없었다는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주최 측이 제공한 체재비 외에 맨해튼 하루 호텔비도 안 되는 100달러 용돈으로 2주를 지내야 하는 그에겐 맥주 한 잔도 사치였다. 사정을 알게 된 다른 나라 기자들은 십시일반 A의 몫을 분담했다. 귀국 전날 밤 A는 동료 기자들에게 베네수엘라 관광엽서에 손으로 꾹꾹 눌러쓴 감사편지를 돌렸다. 그의 손 편지를 읽으며 정치가 실패했을 때 국민들은 어떤 설움을 겪는지 절감했다.

한때 미 플로리다 관광지의 명품 매장에서 “한 개 더”를 외치는 산유국 베네수엘라 관광객들이 넘쳐날 때가 있었다. 베네수엘라에 우고 차베스 정권이 들어선 뒤엔 사정이 달라졌다. 차베스는 부패한 경제 관료와 부자들을 비판하고 소외된 서민들의 분노를 파고드는 전략으로 1998년 선거에서 이겼지만 집권 후엔 서민들에게 경제난과 살인적 인플레를 안겨줬다.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도 없애고 정적과 언론인을 탄압하며 20여 년 좌파 집권 시대를 열었다.

그는 사회주의 시스템을 이식하기 위해 은행 석유 식품 기업을 국유화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렸다. 공공부문 인건비 증가 등으로 재정 부담을 키웠다. 이런 상황에서 달러 수입원인 원유 가격 하락과 수출 감소, 미국의 제재 등이 겹치자 경제는 무너졌다. 통화 가치는 하락했고 인플레가 찾아왔다. 베네수엘라는 지금도 살인적 인플레와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미 하버드대 교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책에서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탈냉전 이후 선출직 권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례로 꼽았다. 냉전 땐 총칼과 탱크를 앞세운 군사쿠데타 세력이 민주주의를 파괴했지만 요즘은 선거를 통해 집권한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이 티 안 나게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진단이다. 총칼이 아닌 투표함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위기는 어디서든 일어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재임 중인 2018년 이 책이 나오자 “트럼프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라고 꼬집었다.

한국에선 올해 12·12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며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동시에 과거 군사정권에 저항하던 세력이 이제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쥐고 포퓰리스트로 변질되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정치 지도자들이 자영업자를 두텁게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국민들에게 재난지원금으로 막대한 돈을 뿌리더니 선거를 앞두고 뒤늦게 자영업자를 걱정한다. 국민을 부자와 빈자로 편을 가르고 ‘세금 폭탄’을 던지다가 선거와 공시가 발표를 앞두고 보유세 현실화를 미루겠다고 속삭인다. 내년 국가부채가 1000조 원을 넘는데도 대선 후보들은 50조, 100조 원의 공약을 던진다. 말을 듣지 않는 관료들에겐 ‘선출 권력에 복종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패는 견제와 균형이다. 기성 정당은 소속 정치인들이 극단주의로 치닫지 않도록 견제하고 유권자들의 투표지에 차악이 아닌 최선의 후보들을 올려놓을 책임이 있다. 나머지는 유권자의 몫이다. A가 요즘 한국 대선판을 본다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충고할 듯싶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베네수엘라 기자#한국 대선판#포퓰리즘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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