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74마리, 반달곰에게 지리산은 좁다[동행: 그렇게 같이 살기로 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17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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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군 지리산 문수골에 있는 자연적응장에서 나무를 오르는 반달가슴곰. 구례=전영한 기자
전남 구례군 지리산 문수골에 있는 자연적응장에서 나무를 오르는 반달가슴곰. 구례=전영한 기자

개체번호 KM-53. 한국(Korea)에서 53번째 태어난 수컷(Male) 반달가슴곰. 사람들은 ‘오삼이’라고 부른다. 2015년 지리산에서 출생한 오삼이는 국내 반달곰계에선 꽤 유명한 ‘셀럽’이다.

그래서 국립공원공단 국립공원연구원 남부보전센터 직원들은 오삼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챙긴다. 다른 곰은 하루 한두 번 점검이 전부다. 오삼이가 더 귀한 몸이라 그런 건 꼭 아니다. 진짜 이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오삼이의 행동 특성 때문이다. 장정재 남부보전센터장은 “국내 반달곰 서식지 확장에 80% 이상을 기여한 게 오삼이”라며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2005년 지리산에 설치한 무인감시카메라에 포착된 KM-53과 어미곰. 나무 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2005년 지리산에 설치한 무인감시카메라에 포착된 KM-53과 어미곰. 나무 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오삼이는 2017년 고향 지리산을 떠났다. 주로 경북 김천 수도산과 경남 합천 가야산을 오가며 산다. 올해만 해도 충북 영동과 전북 남원 등을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남부 4개 도를 넘나들었다. 올겨울에도 오삼이는 지리산이 아닌 가야산에서 잠을 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반달곰들에게 지리산은 너무 좁다. 과거 반달곰 복원 목표는 2020년까지 지리산에 50마리가 사는 것이었다. 현재 반달곰 수는 74마리로 추정된다. 그 중 오삼이를 포함한 4마리가 지리산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반달곰, 더 넓게는 복원에 성공한 동물의 서식지 확대 논의가 필요한 때가 됐다. 멸종위기종 동물과 인간이 일상을 공유하는, ‘복원 이후’가 시작된 것이다.



● 영역 넓힌 반달곰, 찾아온 공존의 시간
1990년대 말에는 지리산 반달곰의 생존 여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97년 동아일보에 실린 야생 반달곰 관련 기사. 동아일보 DB
1990년대 말에는 지리산 반달곰의 생존 여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97년 동아일보에 실린 야생 반달곰 관련 기사. 동아일보 DB

과거 반달가슴곰(반달곰)은 국내 깊은 산 속 어디든 살던 동물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시행된 해수구제(害獸驅除·인간에게 해로운 동물 제거) 정책 탓에 호랑이와 함께 무차별 포획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후 6·25 전쟁을 거치고 웅담을 노린 밀렵이 횡행하며 급격히 줄었다.

1990년대 말 반달곰 멸종 우려가 커지던 중 “지리산에서 반달곰을 봤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1998년 지리산 일대에 대한 정밀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 야생 반달곰 5마리가 발견됐다. 하지만 이 정도 갖고는 멸종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2004년 지리산에 방사된 뒤 첫 동면에서 깨어난 반달곰. 무인감시카메라에 포착됐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2004년 지리산에 방사된 뒤 첫 동면에서 깨어난 반달곰. 무인감시카메라에 포착됐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2001년 사육곰 4마리가 지리산에 시범 방사됐다. 일종의 ‘복원 선발대’다.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고 분석한 끝에 지리산이 다시 반달곰의 서식지가 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곧바로 산 곳곳에 널려 있던 올무 등 각종 밀렵도구 제거 작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2004년 토종 반달곰과 유전자가 동일한 러시아 반달곰 6마리가 지리산에 방사됐다. 지리산 반달곰 복원의 첫 발을 뗀 것이다.

반달곰 시범 방사 이후 20년이 흘렀다. 이제 70마리가 넘는 반달곰은 전북 남원 장수, 전남 광양, 경남 산청 합천 거창, 경북 김천 구미 고령, 충북 영동 등을 누빈다. 반달곰 조사·복원 업무를 담당하는 국립공원공단 산하 국립공원연구원은 반달곰이 사는 곳이 지리산에서 덕유산과 가야산까지 확대됐다고 본다. 더 이상 ‘지리산 반달곰’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도움을 받아 복원된 반달곰이 이제 인간이 정한 경계를 넘어, 자신의 터전을 만들고 있다.

● 교통사고도 못 막은 ‘오삼이’의 개척 정신
2007년 경북 김천 수도산에서 발견된 KM-53. 산길 보수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놓아둔 초코파이를 씹어보고 있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2007년 경북 김천 수도산에서 발견된 KM-53. 산길 보수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놓아둔 초코파이를 씹어보고 있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반달곰 서식지가 확대된 배경에서 ‘반달곰계의 콜럼버스(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란 별명이 붙은 수컷 ‘KM-53(애칭 오삼이)’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오삼이는 올해 여섯 살로, 사람으로 치면 혈기 왕성한 청년이다. 지리산을 떠나 경북 김천 수도산과 경남 합천 가야산 등을 오가며 살고 있다. 지리산에는 번식기인 6~8월에만 들른다.

오삼이의 활동이 처음 포착된 건 2017년. 당시 수도산에서 길을 내던 인부들이 먹으려고 둔 초코파이 상자와 팩 음료를 뜯다가 발견됐다. 남성열 국립공원연구원 생태보전실장은 처음 “곰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을 때 ‘우리 곰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오삼이 귀에 부착된 발신기 배터리는 소진된 상태였다. 남 실장은 “근처 사육농장에서 탈출한 곰이거나, 멧돼지를 착각한 줄 알았는데, 현장에 가 보니 정말 반달곰이었다”며 “지리산에서 수도산까지 직선거리가 80㎞가 넘으니, 실제로는 100㎞ 넘는 길을 돌아갔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만 해도 오삼이의 수도산 출현은 ‘사춘기 반달곰의 일탈’ 정도로 여겨졌다. 사전에 올무 수거 작업이 이뤄진 지리산과 달리, 당시 수도산에는 올무도 많고 주변 환경 파악도 안 돼 있었다. 국립공원공단은 오삼이를 생포해 지리산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오삼이는 일주일 후 또 수도산에 갔다. 다시 포획돼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왜 오삼이가 계속 수도산으로 향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수도산에 산딸기와 다래, 버찌 등 열매 종류가 많고, 곰이 잘 먹는 나물이 많아서라고 추정할 뿐이다. 수도산의 높이(해발 1317m)도 반달곰 서식에 적절하다는 평가다.

관광버스에 부딪힌 KM-53의 앞발 엑스레이 사진. 뼈가 부러졌다. 동아일보 DB
관광버스에 부딪힌 KM-53의 앞발 엑스레이 사진. 뼈가 부러졌다. 동아일보 DB

오삼이는 2018년 5월 세 번째로 지리산을 탈출했다. 이번에는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건너다 시속 100㎞로 달리던 관광버스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왼쪽 앞발 상완골(어깨부터 팔꿈치까지)이 부서졌다. 곧바로 국립공원연구원 내 야생동물의료센터로 이송돼 복합골절수술을 받았다. 야생 반달가슴곰이 복합골절수술을 받은 건 세계 최초다.

당시 수술을 총괄한 정동혁 국립공원연구원 야생동물의료센터장은 KM-53을 떠올리면서 “정말 특이한 애”라고 회상했다. “보통 수술하고 재활하는 과정에서 직원들과 친해지고, 야생성을 잃기 쉬운데 그 곰은 달랐어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잃지 않고, 먹이를 줘도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죠.” 그런 습성 때문에 끊임없는 ‘탈주’가 이어졌을 것이다.

KM-53 수술 준비 모습. 세계 최초로 복합골절수술을 받은 야생 반달곰이 됐다. 동아일보 DB
KM-53 수술 준비 모습. 세계 최초로 복합골절수술을 받은 야생 반달곰이 됐다. 동아일보 DB

약 3개월 후 건강을 회복한 오삼이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아예 이번에는 지리산이 아닌 수도산으로 방사됐다. 반달곰의 터전이 지리산 이외 지역으로 공식 확대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 이를 계기로 반달곰 서식지 확대에 대한 목소리도 커졌다. 오삼이가 3차례나 ‘지리산 탈주’를 감행하면서 공론화한 셈이다.

● “어디서든 반달곰 나타날 수 있다”
전남 구례군 지리산 문수골에 있는 자연적응장에 있는 반달가슴곰들. 구례=전영한 기자
전남 구례군 지리산 문수골에 있는 자연적응장에 있는 반달가슴곰들. 구례=전영한 기자

“이제는 지리산 뿐 아니라 어디서든 반달곰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간혹 오인 신고도 있지만, 목격했다는 제보도 여기저기서 들어와요.”

올해는 지리산을 벗어난 곰이 총 4마리로 늘었다. 모두 수컷으로, 이 중 두 마리는 개체번호가 없다. 보통 야생에서 곰이 태어나면 겨울잠 기간에 국립공원연구원 직원들이 동면굴을 방문해 발신기를 부착한다. 간혹 사람이 갈 수 없는 절벽 등에서 겨울잠을 자며 새끼를 낳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땐 분변과 털 등으로 유전자를 분석해 개체를 확인할 뿐이다. 이 두 마리가 그렇다.

지난 겨울 가야산에서 동면한 KM-53은 올 4월부터 8월 말까지 경북 김천 수도산과 경남 합천 가야산을 중심으로 충북 영동 
민주지산과 전북 무주 덕유산을 오갔다. 번식기(6~8월)에는 다른 반달곰들이 있는 지리산도 들렀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지난 겨울 가야산에서 동면한 KM-53은 올 4월부터 8월 말까지 경북 김천 수도산과 경남 합천 가야산을 중심으로 충북 영동 민주지산과 전북 무주 덕유산을 오갔다. 번식기(6~8월)에는 다른 반달곰들이 있는 지리산도 들렀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지리산을 벗어나고 개체번호가 없는 곰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올해는 ‘KM-86’ 반달곰이 지리산을 벗어나 전북 무주 덕유산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성을 회복한 곰들은 인간이 정한 경계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남 실장은 “지리산을 벗어나는 곰이 늘면 사람과 마주치는 사례도 많아질 것”이라며 “지금까지는 곰 때문에 사람이 다치는 일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달곰 자체는 조심성이 많은 편이다. 사람 소리가 들리면 일단 몸을 숨긴다.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먹는 일도 거의 없다. 주로 도토리, 취나물, 과일 등을 먹는다. 하지만 반달곰을 만난 사람이 위협을 가한다면, 곰 역시 놀라서 사람을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등산객이 정규 탐방로만 다닌다면 곰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다니고, 정해진 곳을 벗어나 비박을 한다. 이들이 들고 다니는 음식 냄새에 홀려 반달곰이 오거나, 지나가던 반달곰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

● 멸종위기종 복원 2단계는 사람과 동물의 공존
곰 퇴치용 스프레이. 곰을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곰 퇴치용 스프레이. 곰을 맞닥뜨렸을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국립공원공단은 곰 서식지가 확대되는 만큼 사람과 곰이 만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방법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중 가장 시급한 것이 곰 퇴치용 스프레이 구입 방식을 간소화하는 것이다. 캠핑을 하거나 등산을 할 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후추나 캡사이신이 포함된 곰 퇴치용 스프레이를 소지하면 위급한 상황에 처할 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국립공원 입구에서 곰 퇴치용 스프레이를 판매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곰 퇴치용 스프레이는 ‘총포·도검·화약류 등 단속법’에 따라 경찰에 신고해야 소지할 수 있다. 내용물은 일반 호신용 스프레이와 동일하지만 용량이 많고 분사 반경이 넓어서다. 국립공원공단 측은 “스프레이를 구입할 때 신분을 확인하는 방식 등으로 절차를 바꾸는 것도 방법”이라며 “반달곰 개체 수가 많아지고 서식지가 넓어질 경우엔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무에 누워 쉬는 반달곰. 사람이 없는 깊은 산으로 가면 반달곰을 마주칠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나무에 누워 쉬는 반달곰. 사람이 없는 깊은 산으로 가면 반달곰을 마주칠 수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국립공원공단 제공

산을 찾는 사람들도 안전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반달곰이 자주 나타나는 곳에 세워진 안내표지판을 눈여겨봐야 한다. 가방에 방울을 달아 소리를 내면서 이동하는 것도 좋다. 또 탐방로와 캠핑지 등 정해진 지역으로 다니는 것도 중요하다. 곰과 같은 야생 동물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고 방울 소리와 같은 금속 마찰음을 들으면 미리 피하는 습성이 있다.

장정재 국립공원연구원 남부보전센터장은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의 최종 목표는 백두대간을 연결해 곰들이 예전에 살던 곳을 자유롭게 오가는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산에서 최소생존개체를 확보한 반달곰 복원사업은 서식지를 늘리고 인간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두 번째 단계에 진입했다. 장 센터장은 “지금처럼 단순히 개체를 추적하고 지리산 위주로 관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사람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과 정책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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