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오피니언

“구하기 힘든 집, 소유하지 않고 구독한다”[Monday DBR/정희선]

입력 2021-11-29 03:00업데이트 2021-11-29 03:03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원격 근무가 확산되며 어디든 일하는 곳이 곧 사무실이 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런 고객들의 달라진 생활양식에 맞춘 주거 형태를 제안하는 서비스들이 등장했다. 관광산업이 마비되자 객실이 차지 않아 힘든 시기를 겪은 일본 호텔들은 국내 재택근무자들을 위한 장기 숙박 서비스를 선보였다. 130년 전통의 고급 호텔 ‘데이코쿠호텔’은 2021년 2월 신사업으로 ‘서비스 아파트먼트’를 선보였다. 36만 엔(약 375만 원)을 지불하면 이 호텔에서 30일간 거주할 수 있다. 3개 층을 개조해 99개 객실을 서비스 아파트먼트로 내놓았는데 예약 첫날 오전에 완판됐다. 고객들 중에는 호텔을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한 개인사업자도 있었고, 일과 휴식을 함께 취할 수 있는 공간을 원하는 기업 임원도 있었다. ‘한 달 살기’처럼 “잠시 도쿄 긴자에 살아볼까”라는 마음으로 신청한 부부도 예약했다.

집을 호텔처럼 사용하는 모델도 등장했다. 도쿄 시부야역에서 3분 거리인 ‘리렌트 레지던스 시부야’ 맨션 거주자들은 외박하면 월세가 줄어든다. 37m² 방의 월세가 19만9000엔(약 200만 원) 정도지만, 최소 3일 전에 애플리케이션에서 외박을 신청하면 1일에 6000엔(약 6만 원)을 할인해 준다. 이 맨션은 빈 방을 일반인에게 호텔로 빌려줘 이익을 낸다.

어드레스(ADDRess)는 일본 최초의 주거 구독 서비스다. 월 4만 엔(약 44만 원)을 내면 어드레스가 운영하는 전국 60개의 숙박 시설 어디에서나 머물 수 있다. 한 주는 오키나와 바닷가 근처에서, 다음 주는 교토의 고(古) 민가에서 지낼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회원 수는 2020년 1월부터 반년 사이에 3배로 급성장했다. 이전에는 프리랜서, 혹은 시간 여유가 있는 개인사업가가 주 고객이었지만 팬데믹 이후 회사원들의 신청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호텔들 또한 ‘다거점 생활자’들에서 사업 기회를 찾고 있다. ‘도큐호텔’은 2021년 4월 일본 전국 39개의 ‘도큐호텔’과 리조트형 호텔인 ‘도큐 버케이션’ 시설을 자유롭게 이동하며 살 수 있는 ‘쓰기 쓰기’를 출시했다. 숙박 시설은 도시를 비롯해 유명 관광지인 고베, 오키나와 등에 골고루 분포돼 있고, 요금은 30박에 18만 엔(약 190만 원), 60박에 36만 엔(약 380만 원)이었다. 4, 5월 시범적으로 ‘60일 숙박 플랜’ ‘30일 체험 플랜’ 등을 모집하자마자 933명이 몰렸다. 이 같은 서비스는 회사가 100% 원격근무를 채택하지 않고 주 2, 3회 출근하는 하이브리드 근무를 시행해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일과 여가를 함께 즐기는 ‘워케이션(work+vacation)’이라고 하면 도시를 벗어나 섬이나 숲에서 일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하지만 호텔 정액 서비스 제공업체인 하프(HafH)에 따르면 이 고객들이 가장 많이 머문 도시는 도쿄였다. 전체 예약 중 30%가 도쿄에 몰렸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도시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호텔을 일하는 장소로 선택했다. 이는 도심에 살며 도심의 호텔을 이용하는 ‘스테이케이션(staycation)’ 수요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족 이외의 사람과는 접촉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일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도 많고, 어린 자녀가 있다면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것이 원격 근무의 본질이다. 집에서 집중이 안 된다면 카페, 호텔 등 최적의 환경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이제 ‘원격 근무=재택근무’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하고, 직장인들은 매주 사는 곳을 바꾸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주거 트렌드가 한국에 이전될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다. 일본은 월세 시장이 발달해 한국보다 주거의 이동성이 높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트렌드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경험을 중시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중에는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쿨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집을 구하기 힘든 젊은 세대가 집을 소유하지 않고 다양한 장소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는 주거 생활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집이 어디세요?”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해할 신인류의 등장에 대비할 때다.

원고는 DBR(동아비즈니스리뷰) 332호(2021년 11월 1일자)에 실린 글 ‘디지털 노마드의 주거 양식’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정희선 유자베이스 애널리스트 hsjung3000@gmail.com
정리=이규열 기자 kylee@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최신기사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