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초등학교에서는 일등을 하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국기를 게양했다. 그런데 데리다의 차례가 됐을 때 다른 학생이 그 일을 대신했다. 그가 유대인이어서 그랬다. 그 일만이 아니었다. 식민정부는 유대인 학생들을 제한하기 위한 할당제를 실시했다. 나중에는 그것마저도 반으로 줄였다. 그의 표현대로 “검고 매우 아랍인 같고 키 작은 유대인”이었던 그가 1942년 10월에 중학교에서 쫓겨난 이유다. 이듬해 4월에 다시 학교로 돌아갔으니 불과 몇 개월이었지만 그 일은 열두 살짜리 소년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그가 철학자가 되어 말하고 쓴 모든 것에 그 상처가 남았다. 조금 과장하면 그 상처가 철학의 출발점이었다. 상처는 그에게 증오에 대한 맞대응을 가르치지 않았다. 원한이나 열등감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자민족 중심주의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것이 가르친 것은 타자에 대한 환대의 정신이었다. 그가 진정한 환대는 환대할 수 없는 것을 환대하는 것이라면서,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환대하자고 얘기한 것도 그 상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대인인 그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하는 폭력에 분개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역사적으로 수난을 당한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을 수난으로 몰아넣는 모순과 위선을 싫어했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