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서울서 독립운동 이끌던 김가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활동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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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 총재 김가진/장명국 지음/248쪽·2만 원·석탑출판

대례복을 입은 동농 김가진. 석탑출판 제공
대례복을 입은 동농 김가진. 석탑출판 제공
대한제국에서 농상공부대신, 외부·법부대신 서리를 지냈고 고종 서거 후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가 됐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냈다. 그의 아들과 며느리, 대동단원 80여 명은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서훈은 7차례나 거부됐다. 의병을 탄압하고, 일제가 주는 남작 작위와 돈을 받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는 이유에서다.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의 이야기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장인 저자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동농이 고종에게 하사받은 땅 1만여 평을 일제에 빼앗기고 대례복을 팔 정도로 가난했던 데다,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망명해 임시정부에 몸담은 행적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리고 동농은 친일 행위를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일본어, 중국어는 물론 영어에도 능통했던 동농은 고종의 최측근이었다. 중국 천진 종사관, 주일 공사를 지낸 그는 세계의 흐름을 폭넓게 읽었고 고종의 ‘대일본 창구’ 역할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반대했고, 대한협회 회장으로서 일진회를 규탄했다.

1906년 충청남도 관찰사였던 동농은 의병을 진압하라는 고종의 명령을 받았지만 의병을 돕다 일본군에게 붙잡힌 이남규 부자(父子)를 한 달 뒤 풀어줬다. 이후 일본군에게 다시 체포된 이남규 부자는 1907년 9월 26일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4개월 전, 동농은 충청남도 관찰사에서 해임돼 이곳을 떠났다. 저자는 “승정원일기에 동농의 부임 및 해임 시기가 기록돼 있다. 이남규 부자의 순국과 동농은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일제가 당시 모든 대신에게 작위를 내렸고, 동농은 고종을 보필하러 조정에 있어야 해 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또 동농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은 증거가 없다고 한다. 일제는 현재 가치로 수억 원에 이르는 은사금을 연간 두 번 지급했고 이를 받을 때마다 당사자는 인장을 찍었다. 저자는 “동농이 은사금을 수령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동농의 집사로 인해 종로구 청운동 1만 평 땅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헐값에 넘어간 건 일제와 가까운 사람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동농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동농은 고종을 퇴위시킨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저자는 “시를 지은 바로 다음 해 동농이 일본 잡지 ‘신공론’에 일본의 병탄 야욕을 꾸짖는 글을 기고한 사실이 확인됐다. 해당 시는 웃음 뒤에 칼을 숨기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꼬며 침탈을 경고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게 적합할 것”이라고 했다.

동농이 상하이에서 눈을 감자 임시정부는 독립신문 1면에 부고를 싣고 3면 톱기사로 애도했다. 장례식에서는 임시정부 주석 홍진이 개식사를 하고 안창호가 추도사를 올렸다. 김구 부부도 문상을 왔다.

장명국 대표는 “동농의 장례식은 임시정부장, 사실상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단칸방에서 살았고 굶주림과 병에 시달리다 숨졌다. 그의 행적을 면밀히 살펴볼수록 친일과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세밀하게 확인해 동농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가진#독립운동#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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