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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두보의 후손 두사충, 하루 천냥 재물운 깃든 경상감영에 둥지

입력 2021-11-20 03:00업데이트 2021-11-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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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대구 근대문화골목
충무공 묏자리 봐준 예언가 두사충
부자들의 집결지였던 진골목 일대
100년 전 양옥 찾아 시간여행
붉은 벽돌 건물에 우뚝 솟은 쌍탑이 돋보이는 대구 계산성당.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임진·정유 전쟁이 끝나자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 두사충(작전참모장)은 귀화를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진지와 병영 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한 풍수 전략가였다. 이순신 장군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이순신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 주는 등 친밀감을 표시했고,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그의 묏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오랑캐(청)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두사충이 정착지로 선택한 곳은 한양이 아닌 대구였다. 현재 대구 중구 포정동의 경상감영공원 터다. 그가 ‘하루에 천 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지목한 곳이다.》


두사충은 왜군과의 전쟁 당시 한반도 곳곳을 누비면서 대구를 점찍어 두었다. 그는 대구의 남쪽 산인 대덕산에서 북쪽으로 치달아온 지맥(地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맥은 대구 시내 연구산(현 대구제일중학교)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처형 장소이자 천주교 순교 성지인 관덕정(대구읍성의 남문 쪽)이 자리한 아미산으로 이어지고, 이 기운은 다시 더 북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경상감영공원까지 두루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발걸음으로는 천보(千步) 정도 거리다. 두사충식 ‘재물 풍수법’에 의하면 한 걸음을 한 냥씩 계산해 천보는 천 냥이 된다. 그만큼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뜻이다.

현재 경상감영공원에는 두사충이 원래 살았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선조 때인 1601년 이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경상감영은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 경북도 청사로 개청한 뒤 1965년 이전할 때까지 ‘영남의 수도’ 역할을 했다. 영남 물자와 세금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두사충의 예언대로 하루 천 냥이 나오는 길지였던 셈이다.

얕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경상감영공원에는 선화당(관찰사 집무처)과 징청각(관찰사 처소) 정도가 남아 있다. 1970년 이곳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중수된 건물들이다. 두사충은 선화당과 징청각 사이에 자신의 집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명당 기운이 강하게 뿜어 나온다. 기운을 얻는 취기처(取氣處)로도 좋아 잠시 쉬어갈 만한 곳이다.

○ 대구 부자들의 집결처

경상감영이 들어서게 되자 감영 바로 아래쪽, 계산동(계산성당 인근)으로 거주지를 옮긴 두사충은 이 일대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당시 조선의 열악한 의복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식솔들의 경제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뽕나무골목엔 두사충과 조선 여인의 사랑 얘기를 담은 상징물이 서 있다. 담장 뒤로 뽕나무가 보인다.
이후 이 일대는 중국 시인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을 시조로 하는 두릉 두씨 세거지가 됐고, ‘뽕나무 골목’으로도 불리게 됐다. 현재 계산성당 출구 쪽 담장에는 뽕나무 골목을 상징하는 8그루의 뽕나무가 자라고 있다. 두사충과 조선 과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현재 두사충이 살았던 뽕나무 골목을 비롯해 인근의 아기자기한 골목은 대구시에서 근대문화골목(1.64km 구간)으로 지정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근대 이후 이 일대가 대구 유명 인사들의 집결지이자 개화 문화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청라언덕으로 오르는 3·1운동계단. 이 길을 통해 대구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서울의 북촌 분위기와도 비슷한 근대문화골목은 ‘명당 골목’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특히 달성 서씨 집성촌이던 진골목은 대구 부자들이 떼로 모여 살았던 공간이다. 1900년대 초반 진골목 최고의 부자는 서병국이었다. 대구로 몰려드는 전국 약재상들을 상대로 한 객주 사업으로 부를 일군 서병국은 3300m²가 넘는 대지에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금의 화교협회(중구 종로 34)가 그가 사무실로 이용하던 건물이고 화교소학교 부지 역시 그의 소유였다.

대구근대역사관에서 근대 양장 차림을 한 관광객들이 역사 체험을 하고 있다.
같은 달성 서씨인 서상돈(1850∼1913) 역시 이곳에서 배출된 부자다.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보부상을 하면서 3만석꾼 거부로 성장한 그는 후세를 위한 민족교육 사업 등에 매진했고, 1907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제에 진 1300만 원의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애국자였다. 진골목은 달성 서씨 부인 등 7명의 여성이 주도한 여성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코오롱 창업자 이원만과 아들 이동찬, 대구 소주인 금복주 창업자 김홍식, 평화클러치 창업자 김상영 같은 부자들도 이 일대에서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한편 경상감영공원에서 서쪽으로 800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삼성그룹 창업자인 이병철 고택(중구 인교동 오토바이골목)과 오늘의 삼성을 키워낸 삼성상회 옛터(인교동 59-3)가 자리하고 있다. 삼성상회 옛터에는 생전에 이병철이 놓아둔 금고 자리도 재현돼 있는데, 재물 기운이 왕성한 터여서 그런지 사람들이 즐겨 쉬어가곤 한다.

○ 100년 전 양옥은 어떤 모습일까?

대구 근대문화골목은 100여 년 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건축물들이 적잖게 남아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유난히 많다. 당시에는 비싼 붉은 벽돌 가옥이 부자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진골목에 있는 ‘정소아과의원’ 간판을 단 건물(가운데)은 근대 양옥 구조를 잘 보여준다.
진골목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벽돌조 2층 양옥인 ‘정소아과의원’은 1937년 화교 건축가 모문금이 설계, 건립한 주택으로 유럽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건축풍이라고 한다. 당시 양옥 건축 양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단출한 구조이지만 빼어난 명당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서상돈의 고택.
뽕나무 골목 인근에는 서상돈이 살던 고택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개량 한옥집인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검소한 삶을 살아온 그답게 참으로 단출한 구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터만큼은 거부(巨富)의 기운을 담고 있는 명당이다. 서상돈 고택은 바로 옆쪽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 고택과 함께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천주교 신도였던 서상돈이 기증한 종(아우구스티노)으로도 유명한 계산성당도 놓칠 수 없는 구경거리다. 서울 명동성당과 평양 관후리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풍이 가미된 로마네스크식 성당(사적 제290호)이다. 초기 계산성당은 불이 나 소실되고, 1903년에 현재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의 풍수적 조언에 따라 원래 예정지인 언덕배기가 아닌 평지 위에 세워진 점도 특이하다. 6·25전쟁 중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청라언덕에 세워진 미국인 선교사 주택.
계산성당 앞에서 서성로를 건너 1919년 만세운동을 했던 ‘3·1운동계단’을 오르면 ‘동산’으로 불리는 청라언덕에 3채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스윗즈, 챔니스, 블레어의 집이다. 녹색 정원에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 대구 시내는 곳곳에 작은 시내가 발달해 장마철만 되면 물에 잠기는 ‘물의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 개발과 더불어 여러 하천이 복개되면서 점차 뜨거워진 도시로 변모했다. 지형의 변화는 교통과 물류의 흐름을 바꾸면서 부의 지도도 달라지게 한다. 번성했던 골목이 쇠락하거나, 침체돼 있던 곳이 발전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대구 골목길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글·사진 대구=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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