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헌재]37세 박경수의 찬란한 가을, 누군가에겐 작은 희망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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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야구에서 각 포지션은 숫자로도 표기된다. 투수는 1, 포수는 2다. 내야 수비의 핵심인 유격수는 6이다.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명유격수였던 류지현 LG 감독(50)은 6이라는 숫자를 분신처럼 아꼈다. 현역 시절 6번을 달았던 류 감독은 그 번호를 후배 박경수(37·현 KT)에게 물려줬다. LG의 6번은 단순한 번호가 아니었다. 1990년대 신바람 야구를 기억하는 LG 팬들은 6번에서 전성기의 류지현을 떠올렸다. 2003년 큰 기대 속에 LG에 입단한 어린 박경수에게 ‘6번 유니폼’은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LG는 2003년부터 기나긴 ‘암흑기’로 빠져들었다.

부상과 부담에 시달리며 좀처럼 꽃을 피우지 못하던 박경수에게 당시 코치이던 류 감독은 넌지시 물었다. “등번호를 바꿔 보는 게 어떻겠니?” 박경수는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코치님, 제가 이겨내 보겠습니다.”

LG의 박경수는 결국 6번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의 야구 인생이 달라진 것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2015년 신생팀 KT로 이적한 이후였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뀔 수 있다. LG에서 만년 후보였지만 KT에선 어엿한 주전이었다. LG에서 진루타나 작전 수행에 특화된 선수였지만 KT에서는 마음껏 방망이를 돌렸다. 포지션은 수비 부담이 덜한 2루수로 바꿨다. 변하지 않은 건 등번호 6번이었다.

KT로 옮긴 첫해 스프링캠프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LG에서 10년간 잡힐 듯 잡히지 않던 타격감, 일명 ‘그분’이 오신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 온 그에게 하늘이 준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LG에서 한 번도 10개 이상 홈런을 쳐본 적 없던 그가 2015년 22홈런을 때렸다. 2018년에는 25개를 담장 밖으로 보냈다. 올해 정규 시즌에서는 타율 0.192, 9홈런, 33타점을 기록했다.

야구에서는 좋은 수비 하나가 홈런보다 값질 때가 있다. 박경수는 최근 두 차례 팀을 살리는 결정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지난달 31일 열린 삼성과의 정규 시즌 1위 결정전 9회말에 그는 선두 타자 구자욱의 안타성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냈다. 1-0으로 승리한 KT는 정규 시즌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따냈다. 15일 한국시리즈 2차전 1회초에는 그림 같은 병살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무사 1, 2루에서 1, 2루 간을 빠져나가는 안타성 타구를 몸을 날려 병살타로 연결시켰다. 팀은 6-1로 승리하며 1, 2차전을 모두 가져왔다. 공은 둥글고 앞으로 남은 경기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KT가 2승을 더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다면 공수에 걸친 박경수의 활약은 새삼 부각될 것이다.

류 감독은 한때 박경수에게 6번을 물려준 것을 미안해했다. 하지만 박경수는 어느덧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6번’이 됐다. 그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생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입단 18년 만에 처음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은 37세 베테랑의 가을은 마지막 화려함을 뽐내는 요즘 날씨를 닮은 것 같다.

이헌재 스포츠부 차장 uni@donga.com
#야구#박경수#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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