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죽기전 멜로디]팻 마티노와 메멘토 비타, 삶을 기억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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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증을 이기고 정상급 연주가로 두 번의 삶을 살아낸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팻 마티노. 사진 출처 팻 마티노 홈페이지
기억상실증을 이기고 정상급 연주가로 두 번의 삶을 살아낸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팻 마티노. 사진 출처 팻 마티노 홈페이지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어느 겨울밤, 서울 마포구의 음악 바. 테이블 앞에 비치된 신청곡 용지로 손을 뻗는다.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다.

‘Pat M…’

여기까지 쓴다면 내 친구 Y는 아마 또 탄성을 지르겠지.

“오, 팻 메시니! ‘Are You Going with Me?’ 들으려고? 이런 날 딱인데….”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의 기대를 깨고 싶다. 노랗게 변색된 종이 위로 난 이제 막 어떤 재즈 기타리스트의 이름을 마저 적어 넣으려 한다.

#1. ‘Pat M…artino’. 그렇다. 나는 지금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팻 마티노(본명 Patrick Azzara)의 기이한 인생에 관해 생각하던 참이다. 메시니만큼 대중적 열광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세계 재즈 음악가들의 상찬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역사적 연주자.

마티노는 10대 때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데뷔작 ‘El Hombre’(1967년)부터 그가 지닌 음표의 온도는 유별났다. 스윙 리듬의 찰기가 넘치는 비밥부터 실험적 재즈 퓨전까지…. 다채로운 팔레트 위를 질주하는 그의 기타는 듣고만 있어도 귀가 개운해진다. 명료하고 이지적이지만 따뜻하고 종종 뜨겁다.

#2.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 경구 ‘죽음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늘 한 번뿐인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고 없는 죽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마티노의 삶을 설명하려면 저 경구를 조금 비틀어야 한다. 메멘토 비타(Memento vita). ‘삶을 기억하라.’ 마티노는 그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을 기억해내는 데 보내야 했다.

#3.
장애를 극복한 음악가를 마주할 때면 겸허해진다. 4년 전 이맘때 경기 가평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에서 만난 미국 재즈 기타리스트 마이크 스턴이 생각난다. 세계적 연주자인 그는 2016년 여름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낙상으로 인한 양팔 골절상과 오른팔 신경 손상. 기타리스트에겐 거의 사망선고였다. 피나는 재활훈련에 들어갔다. 곱아서 굳어버린 오른손가락에서 픽(pick·손에 쥐고 기타를 퉁기는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 미끄러지는 것을 막으려 가발 고정용 풀과 양면테이프로 손을 고정한 채 무대에 오른다. 그는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면 고통도, 자신마저 잊어버린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4. 2016년 만난 미국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케빈 컨은 시각장애를 가졌다. 바로 맞은편에 앉은 기자의 형체는 어렴풋이 보이지만 이목구비는 잘 안 보인다고 했다. 컨은 미니애폴리스시 외곽 숲 지대에 산다. 그곳의 대자연은 컨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많은 걸 들려준다. 사슴, 여우, 코요테의 울음이 만드는 자연의 오케스트라와 희미하게만 보이는 초록 풍경이 컨의 음악이 태어나는 곳이다.

#5.
어떤 불행은 잠입하지 않는다. 별안간 닥쳐온다. 연주자로 최고의 입지를 누리던 1980년, 팻 마티노는 급성 출혈성 뇌동정맥기형으로 뇌수술을 받는다. 대수술은 그를 죽음에서 건졌으나 삶의 일부를 소실시켰다. 뇌수술 뒤 과거의 기억을 거의 모두 잃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친구가 눈앞에 내민 앨범 한 장에 머리가 멍해졌다.

“이게 너야. 기억나니?”

앨범 표지에는 기타를 든 남자가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지금 기타 줄이 몇 개인지도 모른다. 마티노는 저 남자, 마티노라는 기타리스트가 다시 돼보기로 했다. 도레미파부터 다시 시작한 기타 연습. 그리고 연습에 연습…. 그렇게 무려 7년 만에 복귀 앨범 ‘The Return’(1987년)을 내놨다. 그의 기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뜨거운 음표의 화염을 스피커 밖으로 내뿜는다. 그 뒤로 2017년 작 ‘Formidable’까지 15장의 정규앨범을 내고 기타 강습 비디오도 여러 편 찍으며 최고의 연주자로 황금의 나날을 보냈다.

#6.
카세트덱의 카운터가 ‘0’으로 리셋되듯 내게 완전히 새로운 또 한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과거의 삶을 따라잡으려 애쓸 것인가, 새로운 삶을 꿈꿀 것인가. 수십 년간 쌓은 성과를 몇 년 만에 재현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것은 의지의 영역일까, 재능의 영역일까.

마티노가 이달 1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세. 마티노는 그렇게, 기타리스트로 두 번 살았다. 두 번의 삶에서 모두 정상에 올랐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팻 마티노#메멘토 비타#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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