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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특파원칼럼/유재동]트럼프 타워에서 마주친 김정은

입력 2021-11-09 03:00업데이트 2021-11-09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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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영화 같았다”던 판문점 북-미 회동
트럼프에겐 재집권 시나리오 소품에 불과
유재동 뉴욕 특파원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있는 트럼프 타워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평생을 일궈 온 ‘트럼프 제국’의 본산과도 같은 곳이다. 그를 비롯해 가족 여러 명이 이 58층 호화 빌딩에 실제 살았고, 트럼프 재단 본부도 여기에 있다. 또 트럼프를 세상에 알린 TV쇼 ‘어프렌티스’의 촬영 장소이자, 2015년 부인 멜라니아와 함께 황금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그가 첫 번째 대선 출마 선언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작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가 터진 뒤로는 무장 경찰이 트럼프 찬반 집회를 막기 위해 철통 경비를 하고 있는, 그래서 미국 사회 분열의 상징처럼 된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들어가 본 빌딩 내부는 트럼프 재임 시절의 화려함은 간데없고 쓸쓸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테이프로 막혀 있었고 상점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공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진 것이다. 문득 로비에 있는 크고 텅 빈 술집에 눈길이 갔다. 현재 개보수 중인 이곳엔 숫자 ‘45’가 적힌 커다란 금색 문장(紋章)이 전면에 걸려 있었고, 안으로는 45대 대통령 트럼프의 사진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었다. 그중 가장 커다란 액자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2018년 6월 30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트럼프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서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여태 본 적이 없는 사진이었다.

그 순간 그야말로 극적으로 전개돼 온 두 사람의 관계가 머리를 스쳤다. 서로를 ‘로켓맨’, ‘늙다리’ 등으로 거칠게 비난하며 전운을 고조시키던 이들은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어느새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당시 주고받은 27통의 연서(戀書)에서 김정은은 트럼프를 ‘각하’라 칭하며 “마법 같은 우정”, “판타지 영화 같은 만남” 같은 말들로 아첨을 했고, 트럼프도 이에 화답해 둘이 함께 찍은 사진을 선물로 보냈다. 사진의 배경이 됐던 판문점 회동 당일, 트럼프는 “지금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겠다”고 즉석 제안을 한다. ‘백악관 재회’는 결국 성사되진 않았지만, 김정은은 대신 액자에 담긴 채로 트럼프 제국의 심장부에 초대돼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 김정은의 사진을 걸어놓은 것이 트럼프의 의중에 따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가 이 만남을 아직까지도 각별하게 여긴다는 점을 추론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트럼프는 2019년 12월 워싱턴포스트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와 인터뷰에서 김정은과 찍은 판문점 사진들을 모두 책상 위에 꺼내 보였다. 그러면서 “(역대 대통령)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정말 멋지지 않나”라며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회담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북한의 비핵화는 그날 판문점 만남 이후 한 발짝도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김정은과 만난 사실을 내세우기에만 바빴던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사업 실패와 검찰 수사 등으로 위기에 처한 트럼프는 얼마 전 공화당의 주지사 선거 선전(善戰)을 통해 재기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젠 그가 3년 뒤 대선에 재출마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의 정치적 이기심과 즉흥적인 쇼맨십이 아무 성과 없이 한반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도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다음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든 이 허무한 쇼의 재방송만큼은 다시 보고 싶지가 않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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