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의 공과 …최초 직선제부터 아쉬운 경제 정책까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6일 15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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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공과(功過)는 엇갈린다. 대통령 선거 직전 직선제를 도입해 민주화를 앞당겼고 적극적인 북방외교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영향력을 대폭 넓혔다. 반면 5공화국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고 경제 정책의 실패는 아픈 대목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민주주의 발전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무시하고 그해 4월 ‘호헌(護憲·현행 헌법 유지) 선언’을 했다가 ‘6월 민주항쟁’을 맞게 된다.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는 당시 민주화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담은 ‘6·29 선언’을 발표했다. 군사적 권위주의 종식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으로 거론된다.

나름대로 ‘5공화국 청산’도 시도했다. 5공화국 비리 특별수사부를 만들어 전두환 전 대통령 등 군사정권 관련자 일부를 사법처리한 것이다. 헌법재판소 설치와 지방의회 구성을 통한 지방자치제 부활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1988~93년 대통령비서실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한 염홍철 전 대전시장은 “노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로 회귀될 수도 있는 전환기의 상황에서 독특한 인내심과 민주화 관리를 잘 해냈다”고 말했다.

북방 정책은 노태우 정권이 야심 차게 추진한 사업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88년 ‘7.7 선언’으로 불리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북한과의 적대적인 대결관계를 청산하고 관계개선에 나설 것이며 중국과 소련 등 공산국가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공개했다. 헝가리와의 첫 수교로 물꼬를 튼 북방정책은 이후 폴란드 유고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거의 모든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정상화로 이어진다. 이어 90년 소련, 92년 중국과의 수교도 성사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 91년 북한과 함께 제 46차 유엔총회에서 161번 째 회원국으로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 장면을 연출했다. 민병석 전 체코대사는 “북한과 유엔무대에서 경쟁하던 시절을 벗어나 국제사회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던 시점이었다”며 “한국의 ‘단독가입’ 추진에 ‘동시가입은 분단영구화’라는 논리를 펴던 북한이 ‘동시가업’을 수용했다”고 회고했다.

북한은 냉전체제 붕괴라는 외부환경 변화에 이끌려 남북관계의 기본 틀로 평가받는 남북한 기본관계 합의서 채택, 한반도 비핵화 선언 등을 통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반응했다. 또 평시 작전권 반환, AFKN 채널과 용산 골프장 반환 등 미국을 상대로 한 다양한 요구사항이 쏟아져 나왔다.

‘범죄와의 전쟁’도 노 전 대통령 재임 중 업적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이 1990년 10월 13일 범죄와의 전쟁 선언 이후 조직폭력배가 상당 부분 근절돼 치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보통 사람’ 슬로건으로 당선됐던 그가 대통령에 대한 각계의 풍자를 폭넓게 허용한 점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5공화국의 연장선에서 새 정부를 출범시켰다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경력이 관리된 ‘체제 순응형’ 지도자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학계와 정치권에서는 노태우 정부와 관련해 “군복에서 양복으로 갈아 있는 단계, 완전 문민화 이전의 중간 단계”라고 평가하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는 시위 등 온갖 불만이 표출됐던 시기로 ‘민주화’라는 타협이 불가피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용납하지는 않지만 용인할 수밖에 없었던 리더십’으로 완충적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1990년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김영삼 문민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호남을 배제한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당시 3당 합당이 호남 차별주의로 이어지고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3당 합당은 정치적으로는 승리이지만 호남 등 지역주의를 강화시켰다”고 했다.

경제 분야의 점수도 좋지 못하다. 노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국내 경제는 3저(저유가, 저금리, 저달러)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전두환 정부로부터 무역흑자 기조를 이어받았지만 일관성 없는 경제정책으로 성장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수서택지 분양 사업, 율곡사업(차세대 전투기 및 무기도입 사업) 민영방송 사업자 선정,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비자금을 조성해 결국 뇌물수수 혐의로 법정에까지 섰다. 결국 이 같은 재벌과의 유착으로 정권 초기 시도했던 토지공개념 도입 등 경제정의 실천을 위한 개혁 추진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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