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유재동]올해 산타에겐 시간이 없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입력 2021-10-19 03:00수정 2021-10-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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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물자·부품 모두 부족한 현실
공급망 확보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
유재동 뉴욕 특파원
얼마 전 미국의 물류대란 취재를 위해 트럭 기사 A 씨를 만났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은 왠지 거칠고 퉁명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그는 꽤 친절했고 오랫동안 대화에 응해줬다. 트럭 기사와 운송 장비가 모자란다는 얘기를 하던 그는 대뜸 자신이 인근 뉴햄프셔주의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박사학위 과정 중이라는 말을 꺼냈다. 등록금도 벌 겸 부업으로 화물차 운전을 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사 지망생의 ‘트럭 알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A 씨는 “이 일이 요즘 보수가 좋다”며 “내 연봉은 여섯 자리(six-figure)나 된다”고 귀띔했다. 말 그대로 100,000(10만)달러 이상, 한국으로 치면 억대 연봉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젊은 화물차 기사가 풀타임이 아니고도 이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는 게 처음엔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문득 그때 머리를 스친 게 있었다. 그날따라 도로 곳곳에 내걸린 ‘트럭 기사 급구’ 팻말들이었다.

미국에선 요즘 트럭 운전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경제 활동의 증가로 화물 운송 수요는 늘었는데 막상 기사 공급은 원활치 않다. 험하고 고된 직업을 마다하는 사회 분위기도 있지만 기존의 나이 든 기사들이 대거 일선에서 은퇴한 것도 요인이 됐다. 다급해진 물류회사들은 보수와 근무 여건을 대폭 개선하고 서둘러 운전사 모집과 양성에 나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팬데믹 이전만 해도 5만 달러를 넘지 못했던 이들의 평균연봉이 이젠 7만∼8만 달러까지 올랐다. 그런데도 사람을 구하는 게 예전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트럭 기사 구인난은 최근 미국이 겪고 있는 공급망 붕괴의 양상 중에서도 아주 일부에 해당한다. 최근 미국에 파견 나온 한국기업 주재원 B 씨는 자동차를 구입하려고 시세를 알아보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딜러가 차량 정가 외에 웃돈으로 1만 달러(약 1200만 원)나 요구했던 것이다. 반도체 공급난으로 생산 차질이 빚어지면서 미국에서 요즘 자동차 값은 천장을 뚫고 있다. 인력난, 물자난이 일상을 위협하는 현상은 이 밖에도 곳곳에서 관찰된다. 미국 내 어떤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먹일 급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다시 원격수업 전환을 준비 중이다. 마트에선 난데없이 기저귀가 동이 나고, 농부들은 필요한 농기계를 구하지 못해 난감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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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에 대한 미국인들의 두려움은 연말 시즌으로 향하고 있다. 핼러윈과 추수감사절, 성탄절이 몰려 미국의 배송 수요가 가장 집중되는 시기다. 물류업계는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문하려면 지금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한다. 매년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성탄 선물을 늦지 않게 배송해 온 산타클로스지만, 올해만큼은 물류대란의 암초를 만나 미션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최근 “우리의 공급망은 어떤 충격에도 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면서 팬데믹과 기후변화, 사이버 공격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나마 겪어본 게 이 정도이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위협은 이보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대유행을 계기로 뜻밖의 위기가 언제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고, 지금의 방식은 이를 견뎌내기에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았다. 트럭 기사나 반도체의 부족은 일시적 현상일 수 있지만, 튼튼한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각국의 경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산타#공급망 확보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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