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누가 언론의 입을 막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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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스피러시/라이언 홀리데이 지음·박홍경 옮김/416쪽·1만9500원·책세상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미국 프로 레슬링을 호령하던 노령의 스타 헐크 호건이 다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2012년 링 밖에서였다. 미국 언론사 ‘고커(Gawker)’가 그의 섹스 비디오를 공개하면서 한물갔던 스타는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호건은 사생활 침해 및 정신적 피해 보상을 이유로 이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조차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는 게 결코 쉽지 않던 2007년. 고커는 페이팔의 창업자이자 억만장자인 피터 틸이 동성애자라는 폭로를 자사 블로그에 올렸다. 고커라는 공통분모 외에 전혀 다른 삶의 궤도를 살아왔던 호건과 틸은 2016년이 되고 나서야 한 배를 탔음이 밝혀진다. 플로리다 법정이 고커로 하여금 호건에게 1억4000만 달러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가장 기뻐했던 이 중 하나는 틸이었다. 그는 과거 동성애자 폭로로 입은 자신의 피해에 보복하기 위해 10년 넘게 호건에게 소송 비용을 은밀하게 지원해 왔다. 유명인의 위선과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사회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던 고커는 결국 배상금을 감당하지 못해 파산을 신청한다. ‘컨스피러시’는 한 자산가가 어떻게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는 음모를 꾸몄는지 그린 책이다. 저서 ‘나는 미디어 조작자다’를 집필한 칼럼니스트이자 기업의 마케팅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저자는 고커 소송 이면에 도사린 음모를 파헤쳤다. 법의 허점을 이용한 틸이 거대 자본을 무기로 언론·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 1조를 위배했다고 봤다.

국내에도 이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까지 국회에서 공회전하던 ‘언론중재법 개정안’은 언론 자유를 침해할 독소 조항을 안고 있다. 자본가, 기업에 의해 ‘입막음용 소송’이라 불리는 전략적 봉쇄 소송도 가능케 할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틸의 순자산에서 0.3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돈이면 언론사를 쫓아낼 수 있다”고.



김기윤 기자 pep@donga.com
#언론#컨스피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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