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이재명 앞에 던져진 ‘큰 차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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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10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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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이낙연 승복은 갈등 봉합의 시작일 뿐
수사 중인 대장동 리스크 해소가 선결과제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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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당이 반쪽 날 정도로 격렬했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석패한 박근혜는 곧바로 승복 선언을 했다. 노무현 정권의 인기가 워낙 바닥이어서 이 경선 결과로 대선이 사실상 끝났다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돌발 변수가 터졌다. 보수 성향의 이회창이 무소속 후보로 전격 출사표를 던진 것. 이명박 낙마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플랜B’라는 명분이었지만 보수 표 분산이 우려됐다. 실제 이회창의 최종 득표율(15%)도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상당수 친박 지지자들이 같은 당의 이명박이 아니라 이회창을 선택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이명박의 당선(최종 득표율 48.67%)은 무난했지만 기대를 걸었던 과반 득표는 무산됐다. 치열했던 경선 과정에서 파인 감정의 골은 그만큼 깊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와 비교하면 이번 민주당 경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경선 후유증 수습은 걱정 말라는 정치적 레토릭이겠지만 민주당 경선도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특히 경선 막판에 불거진 대장동 사건으로 민심의 경고장을 받은 이재명 대세론은 흔들렸다.

이낙연의 승복 선언으로 ‘원 팀’의 첫 고비는 넘겼지만 경선 과정에서 쌓인 앙금이 눈 녹듯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다. 승복 절차는 ‘원 팀’으로 가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후보 차원을 넘어 지지자들까지 완전히 한 몸이 되는 화학적 결합은 차원이 다르다. 그만큼 현실은 녹록지 않다.

두 세력 간 갈등의 뿌리도 깊다. 이재명은 2007년 여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정동영 캠프에 적극 참여했다. 노무현 청와대와 불편했던 정동영 캠프는 당시 친노 세력이 밀었던 이해찬 캠프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런 악연은 지속됐다. 201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재명 캠프는 노무현 정권 계승을 내건 문재인 캠프와 거칠게 맞붙었고 그 앙금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친문 세력은 이번 경선에서 일사불란하게 특정 후보를 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낙연 캠프엔 다수의 친문 주류가 참여했고, 이재명 캠프에선 비주류 진영이 주력군을 형성했다. 이재명 캠프에 속한 비주류 의원들은 사석에서 “민주당 정부라는 이 정권에서 장관을 맡은 사람도 거의 없지 않으냐”라고 한탄했다는 후문이다.

경선 직후 한 여론조사에선 이낙연 지지층 가운데 이재명에게 투표하겠다는 비율이 14%에 그쳤다. 오히려 국민의힘 윤석열에게 투표하겠다는 비율이 40%나 되는 결과가 나왔다. 경선 갈등 봉합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대장동 사건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이재명 캠프는 대장동 사건을 ‘국민의힘 게이트’라고 몰아붙인다. 여야 대결 전선이 뚜렷해질수록 당내 갈등을 잠재울 거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재명 스스로 대장동을 설계했다고 인정했고, ‘측근’들이 연루된 사건을 야당 탓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가 생물이듯이 수사의 향배도 가늠하기 쉽지 않다. 더욱이 대선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이재명 캠프와 대선 이후 안정적 퇴임을 바라는 문재인 청와대의 시각도 꼭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재명은 여당 의원총회에서 “큰 차이들은 오히려 큰 시너지의 원천”이라며 단합을 호소했다. 또 ‘1+1’을 2가 아니라 3, 4로 만들자고 했지만 2가 되기도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이재명이 ‘큰 차이’들을 어떻게 극복해낼지 지켜볼 일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이재명#큰 차이들#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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