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받은 언론인 속한 독립매체, 폐쇄 위기 직면…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11일 13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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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정부 비판적 매체 래플러(Rappler)의 공동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마리아 레사가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해당 매체는 폐쇄 위기에 직면했다고 9일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래플러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지지자들의 온라인 공격과 흑색선전, 필리핀 정부와 유력 기업과의 소송전에 직면했다.

NYT에 따르면 레사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래플러의 기자들은 용기를 얻었으나 그들은 “우리 앞에 어려운 시기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온라인 탐사보도 플랫폼인 래플러가 폐쇄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현재 레사와 래플러 기자들에게는 명예훼손 등 일곱 건의 소송이 제기된 상태다. NYT는 “필리핀의 몇 안 되는 독립언론 중 한 곳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전했다.

래플러에 대한 온라인 공격도 심해지고 있다. 과거에 두테르테 대통령이 래플러 기자들을 “사살돼야 할 간첩들처럼 취급해야 한다”고 비난한 뒤 그의 지지자들은 온라인에 래플러를 비방하는 글을 퍼뜨리고 있다. 2012년 설립된 래플러는 두테르테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 과정에서 경찰이 시민들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일부 사망자들은 경찰에서 체포된 자리에서 즉결 처형됐다고도 보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필리핀의 첫 노벨상 수상자인 레사의 수상에 대해 아직 입장이나 소감을 밝히지 않고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래플러 편집국은 언론사의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래플러에서 가짜뉴스 대응을 이끌고 있는 젬마 멘도자는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고 했다. 편집국 내에선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래플러 기자들은 대부분 20대로 젊은 편이다. 100명 가량의 기자들이 있는데 나이순으로 가운데에 속하는 연령이 23세다. NYT는 “이들이 심리적 압박 때문에 지쳐가고 있다”고 전했다.

래플러에 대한 당국의 탄압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2018년 1일 필리핀 증권거래위원회는 레사가 미국과 필리핀 이국국적이라는 점을 이유로 래플러가 ‘외국인 소유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고 설립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필리핀의 인권단체들은 “마약과의 전쟁을 래플러가 비판 보도하자 당국이 보복에 나섰다”고 항의했다.

레사를 비롯한 래플러 공동설립자 4명은 대응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래플러 편집국에서 이들은 ‘마낭(manangs)’으로 불린다. 필리핀어로 ‘사랑하는 누나들’을 의미하는 일종의 애칭이다. 설립자 중 한 명인 글렌다 글로리아는 “래플러는 필리핀 당국의 체포, 급습, 징역형 선고, 언론사 폐쇄 등 네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한 훈련을 마쳤다”고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래플러뿐만 아니라 언론 전체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내왔다. 그는 2016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에 “더 이상 언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언론이 내 말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7년에는 래플러를 향해 “미국인 소유 언론사”라고 비난했다. 이듬해에는 래플러를 “가짜뉴스 매체”라고 했다.

NYT는 “최근 언론의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미국의 많은 언론사들처럼 래플러도 ‘사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고 전했다. 래플러의 한 기자는 “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단순히 ‘받아쓰기’를 하는 필사자, 혹은 속기사에 머무르길 바란다. 하지만 그렇게 돼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존재가 위태로울 때, 당신이 과연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당신은 과연 누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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