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때 계엄군 최루탄에 여고생 부상… 42년만에 드러난 새 진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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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위서 새로운 사실 규명
“조사기한 연장해 진실 더 밝혀야”

1979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7면. 이혜만 동아일보 부산담당 기자는 계엄군의 지침을 어기고 부마항쟁의 시위 현장을 취재해 기사로 남겼다. 동아일보는 인쇄 중단 조치됐고 이 기자는 경찰에 수배됐다.
1979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7면. 이혜만 동아일보 부산담당 기자는 계엄군의 지침을 어기고 부마항쟁의 시위 현장을 취재해 기사로 남겼다. 동아일보는 인쇄 중단 조치됐고 이 기자는 경찰에 수배됐다.
1979년 10월 17일 밤, 부산 동주여상에 다니던 서모 씨(당시 18세)는 하굣길 광복동 거리를 지나다가 갑자기 날아든 사과탄(최루탄)에 얼굴을 맞았다. 눈과 귀,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은 서 씨는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사과탄은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쏜 것이다. 당시 부산에서는 군사독재에 맞선 대규모 시위가 한창이었다.

서 씨에게 그날의 사고는 잊을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았다. 트라우마로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극단적 선택도 시도했다. 결국 폐결핵까지 악화돼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쳤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던 부산여대 학생 60명도 이날 경찰에 연행됐다. 여학생이 시위에 집단으로 참여한 것은 부산여대가 처음이었다.

서 씨와 부산여대 학생의 시위는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진상위)가 최근 새롭게 밝혀낸 부마항쟁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를 시작으로 부산과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은 5·18민주화운동 등과 함께 현대사 4대 항쟁으로 꼽힌다. 부마항쟁은 유신의 붕괴를 앞당긴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1500여 명에 달하는 학생과 시민을 연행하는 등 강제 진압을 했다. 2014년 뒤늦게 진상위 활동으로 수면 아래의 진실이 하나둘 드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현행법 개정으로 재개된 진상위는 올 6월 활동기간이 만료되면서 공식적인 활동이 끝났다. 활동 기록이 망라된 보고서는 12월 초 발간될 예정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최인호 국회의원(부산 사하갑)은 진상위의 활동기간을 3년 이내로 연장하고, 조사인력을 확충하는 내용을 담은 부마항쟁 보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차성환 진상위 상임위원은 “항쟁 당사자를 만나는 조사요원이 4명밖에 안 됐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가 34명인 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며 “조사 기한을 연장하고 인력을 충원해 진실을 더 밝혀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부산=김화영 기자 run@donga.com
#부마항쟁#사과탄#최루탄#트라우마#유신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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