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당한 박해의 역사… 작품 자체에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 있죠”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4일 12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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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프랑스 국민주의 음악운동 선구자 샤를 카미유 생상스(1835~1921)의 대표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를 국립오페라단이 10월 7~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다. 구약성서 판관기(사사기)에 나오는 영웅 삼손과 그를 꾀어 힘을 빼앗는 블레셋 여인 델릴라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대작이다.

연습이 진행중인 서울 서초동 국립오페라단 연습실에서 지휘자 세바스티안 랑레싱, 연출가 아르노 베르나르, 7·9일 삼손을 노래하는 테너 크리스티안 베네딕트, 그와 호흡을 맞춰 델릴라를 노래하는 메조소프라노 이아경을 만나 이번 공연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제작진과 남녀 주연배우 인터뷰.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제작진과 남녀 주연배우 인터뷰.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 배경을 1938년 독일에서 일어난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으로 설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베르나르(연출): 구약성서를 기본으로 한 이 오페라의 줄거리는 현대에 유대인이 당한 박해의 역사와 잘 들어맞습니다. ‘수정의 밤’ 사건이란 나치 돌격대와 독일인들이 하룻밤 사이에 유대인 상점 7000곳 이상을 불태우고 유대인 3만 명 이상을 체포한 사건이죠. 이 작품 자체에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정치적 맥락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찾아내, 현대 관객들에게 오늘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습니다.

―고대를 현대로 바꾼 시도인데, 의도가 잘 전달될까요.

베르나르: 연습을 진행하면서 독창진이나 합창단의 반응을 보면 잘 받아들이고 있고 의미가 있는 컨셉트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상스의 음악 자체가 매우 강렬하기 때문에 이렇게 시대를 바꿔 선보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바로크 오페라라면 이런 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맞지 않겠죠.

―음악 자체가 강렬하다고 했는데, 어떤 특징을 꼽을 수 있을까요.

랑레싱(지휘): 이 작품은 프랑스 낭만 오페라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생상스는 이 작품에 프랑스 오페라의 전통과 당대 각국 오페라의 모든 영향을 녹여 넣었습니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오라토리오(무대 배경 없이 진행되는 종교적 음악극)로 계획했기 때문에 오라토리오의 특징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 비교할 만한 작품이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중창 장면들에는 후기 베르디나 바그너의 영향도 엿보이죠. 단 하나의 장면에도 열다섯 개 이상의 음악적 경향들을 발견할 수 있는 오페라입니다.

베르나르: 오라토리오로 시작한 작품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음악들이 길고 독백과 같은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음악과 연출이 손잡고 더 강렬한 오페라적 요소들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배경으로 삼은 데는 이런 면도 작용했습니다. 작품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더 흥미롭게 꾸며야 했습니다.

―오페라의 여성 주역은 대부분 소프라노가 맡습니다. 메조소프라노에게 타이틀 롤이 주어지는 경우는 비제 ‘카르멘’ 등이 있지만 드문 편인데요.

이아경(델릴라): 그동안 독창회나 갈라콘서트에서는 이 오페라의 대표 아리아인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 열리고’를 자주 불러왔죠. 선율이 매우 유려하고 호소력이 깊은 노래이지만 이번에는 매우 다른 느낌이 될 겁니다. 제게도 새로운 도전입니다. 연습하면서 종종 ‘지금까지 내가 불러온 이 노래 맞나?’ 싶어요. 이번 무대의 델릴라는 삼손과 사랑이라곤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계략에만 충실한 히로인입니다. 어떻게 전혀 사랑 없이 행동할까. 이번 무대에서 제가 스스로 풀어내야 할 과제입니다. 비판이 많이 나올수록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삼손 역에게는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지만, 이 작품의 메조소프라노는 ‘그대 목소리에 내 마음 열리고’라는 유명한 노래를 부르지만 테너의 경우 어디가 하이라이트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베네딕트(삼손): 저는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극장과 바스티유 오페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에서 삼손 역을 노래해 왔죠. 독집 앨범에도 이 오페라의 아리아를 두 곡이나 넣었습니다. 3막 초반에서 체포돼 몸이 묶인 삼손이 부르는 ‘나의 불행을 보라’ 같은 아리아는 매우 강렬한 곡입니다. 합창단이 함께 해야 효과가 나기 때문에 잘 불리지 않는 것 뿐이죠.

이 작품의 3막에는 ‘네가 말할 때 나는 귀가 먹었다’라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신의 말씀에 대해 영적으로 귀가 먹어 듣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나치가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 학살이 일어나지만,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영적인 죽음에 있습니다. 삼손을 연기할 때 이 점에 신경을 쓰려 노력합니다. ‘수정의 밤’을 배경으로 한 이번 연출은 매우 강렬해서 제가 기대하는 점에 잘 맞습니다.

―델릴라와의 ‘케미’도 좋습니까.

베네딕트: 이아경 씨와 엄청나게 잘 맞죠. 주연 사이에 생각이 안 통하면 연습 과정이 처음부터 내내 지루해집니다. 이번 연습은 처음부터 내내 즐겁습니다.

이아경: 상대역인 베네딕트의 ‘파워풀한 삼손’이 제 힘을 더 이끌어내 줄 수 있을 걸로 기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조금만 나를 밀어주면 좋겠다’, ‘한두 발자국 더 오면 자연스럽겠다’ 같은 요구에도 즉각적으로 서로 이해하는 편이죠. 그가 펼칠 ‘영적인 삼손’과 내가 연기할 ‘계략적 델릴라’가 만나면 멋진 효과를 낳을 것 같습니다.

―지휘자 랑레싱과 연출가 베르나르 두 분은 그동안 ‘마농’ ‘윌리엄 텔’ ‘호프만의 이야기’ ‘피델리오’ ‘라보엠’ 등 국립오페라단이 주최한 수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오셨습니다. 매번 먼 한국으로의 여행에 선뜻 응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랑레싱: 제 경우 한국의 훌륭한 성악가들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악 영재 밀도는 세계 최고입니다. 그들이 해외에 나가 성공을 거두고 고국 무대에도 출연하면서 공연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저로서는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입니다. 집에서도 만들어 먹고, 김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웃음)

이아경: 최고의 합창단도 빼놓을 수 없다고 말씀 하셨죠. 이번 공연은 특히 합창단에게 고마워해야 할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잘하고, 너무 열심히 연습하고 계십니다.

랑레싱: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젊고 뛰어난 합창단이 있습니다. 이번 공연을 연습하면서 제가 전 세계에서 최근 함께 작업한 합창단 중 최고라고 느꼈습니다.

베네딕트: 특히 삼손 역은 합창단과 잘 조화를 이뤄야 성공할 수 있죠. 훌륭한 델릴라, 훌륭한 합창단과 함께 어서 무대에 올라 이 모두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공연은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고 노이오페라합창단이 출연한다. 8, 10일 공연에는 테너 국윤종과 메조소프라노 김정미가 출연한다. 대사제 역은 바리톤 사무엘 윤과 이승왕이, 아비멜렉 역은 베이스 전승현이 맡는다. 7, 8일 오후 7시 반, 9, 10일 오후 3시 공연한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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