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서 美 개척시대 숲을 떠올리다[안드레스의 한국 블로그]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입력 2021-10-01 03:00수정 2021-10-0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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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일주일 전, 서울 충무로의 한 극장에서 ‘퍼스트 카우’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날 이후 매일 밤 잠들기 전, 검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숲에서 주인공이 버섯을 따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또 그려보았다. 새벽 어스름이었는지 해가 어둑해질 무렵이었는지 모를 영화의 그 모습은 그렇게 며칠 동안 잠의 문턱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미국의 영화감독 켈리 라이카트가 만든 ‘퍼스트 카우’는 예고편을 보고 상상했던 것과 매우 달랐다. 미국 황금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서부극임에도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르는 프레임과는 대척점에 있었는데, ‘아메리칸 드림’의 아름다운 실패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18세기 영국 시인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로 시작된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인 듯하다.

“새에겐 둥지, 거미에겐 거미줄, 인간에겐 우정.”

그러니까 ‘퍼스트 카우’는 1820년 미국 오리건주의 한 숲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의 우정에 관한 영화다. 각각 메릴랜드와 중국을 떠나 미국을 떠돌며 황금을 찾아다니는 인생을 조명하며 특정한 역사적 시기를 다룬다.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시스템의 씨앗이 싹을 틔우며 미래의 삶을 모조리 바꾸게 되는 시대로서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이때부터 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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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 때마다 생각나던 영화의 장면은 며칠이 더 지나니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렇게 영화가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지난 주말에 서울에서 네 시간 반, 안동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주왕산국립공원에 다녀온 덕분이다. 원래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하고서 떠난 여행이 아니었다. 충동적으로 갑자기 떠난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벽에 일어나 첫 기차를 타는 수고까지 감수했다! 처음엔 그저 그런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서울에만 갇혀 있어서 답답하니 계곡에 가서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는 단순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주왕산 한가운데서 눈앞에 ‘퍼스트 카우’에서 보았던 숲이 그대로 펼쳐진 것을 보았다. 산에 들어가기 직전에 비가 온 터라 막 젖은 숲속의 바위엔 부드러운 카펫 같은 이끼가 촉촉하게 깔려 있었다. 위로 곧게 뻗은 나무들의 잎은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 중이었고, 곳곳에 포진된 거미줄은 탱글탱글한 이슬을 머금었으며 폭포수와 계곡물은 더욱 세찬 소리를 내며 흘렀다. 생명력이 넘치는 지구에선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퍼스트 카우’의 주인공인 쿠키에 빙의된 것처럼 습기 찬 땅과 낙엽을 뒤적이며 버섯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주왕산이 원래 송이버섯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는 얘기도 들어 하나 발견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나무 사이를 살펴보았다. 마침내 부러진 나무통 사이로 삐져나온 버섯을 하나 발견했다. 너무 깨끗하고 하얀 것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램프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색과 종류가 다른 다양한 버섯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국립공원에서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면 안 되므로 따지 않고 대신 사진으로 담았다.

산행을 마칠 무렵, 차갑고 맑은 샘에서 손을 씻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 문득 영화 ‘퍼스트 카우’가 나를 이 멀고 비밀스러운 곳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세상의 모든 영화가, 문학이, 예술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신비로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다. 한 감독의 상상력이 두 인간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게 했고, 그 상상력 덕분에 기묘한 시대에 불안감에서 벗어나 한국의 산을 다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그저 눈만 감으면 버섯으로 둘러싸인 숲속의 내 모습이 보인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주왕산#미국 개척시대 숲#퍼스트 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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