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김창일의 갯마을 탐구]〈67〉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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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어떤 사람들에게 전복은 고통의 근원이었다. 전복 잡는 일은 힘들었고, 수탈당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버텨내기 버거웠지만 피할 수 없었기에 바다로 가서 전복을 잡았다.

“위태롭구나, 전복 따는 여인이여. 바다에 나가 맨몸으로 들어가네. 저 괴로운 생애 가련해서, 어진 사람은 차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네.” 제주목사 이예연은 전복 따는 해녀의 애처로운 모습에 차마 전복을 먹을 수 없음을 시로 표현했다. 세종 때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기건은 전복 따는 노고를 본 후로 전복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정조는 “전복 캐는 수고로움을 생각해 보니 어찌 전복 먹을 생각이 나겠는가”라고 했다. 많은 위정자들이 전복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백성의 노고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폭압적인 전복 공납은 이어졌다. 말린 전복은 왕의 하사품, 사례품 등으로 이용된 중요한 공물이었기에 철저히 관리했다.

김상헌은 남사록(南사錄)에서 “진상하는 전복 수량이 매우 많고 관리들이 공을 빙자해 사욕을 채우는 것이 몇 곱이 되므로 전복 잡는 포작인들은 견디지 못해 도망가고 익사하여 열에 두셋만 남게 됐다”고 했다. 제주목사 이형상의 상소문에 실상이 잘 나타나 있다. “지아비는 포작에 선원 노릇을 겸해 힘든 일이 허다하며, 지어미는 잠녀(해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미역과 전복을 마련해 바쳐야 하니 그 고역이란 목자(牧者)보다 10배나 됩니다. (중략)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하려 함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혹독한 수탈이었다. 버티고 버텨도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도망칠 수밖에. 해산물 공납에 지친 포작인과 해녀는 목숨을 걸고 난바다의 검푸른 파도를 건넜다. 관리들 힘이 미치지 않는 뭍과 해안에 정착하거나 이 섬 저 섬 옮겨 다니며 살았다. 육지 사람들은 이들을 두모악(한라산의 별칭)이라 불렀다. 성종실록에 두모악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집단으로 정착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 전라 바닷가에 정박하는 자가 수천 명이다”고 했다. 전복을 잡아서 공납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얕은 물에서 미역 채취하던 해녀들에게 역을 지게 했다. 제주목사 이익태가 지은 지영록(知瀛錄)에 “전복 캐는 해녀는 90명, 미역 채취하는 해녀는 800명에 이른다. 해녀들이 전복 캐는 일은 죽기를 무릅쓰고 피한다”고 했다. 고역의 정도가 현격히 달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쇠하거나 병약한 해녀는 다른 해녀에게 전복을 사서 바치기도 했다.

박물관에 근무하며 전시실과 수장고에 보관된 전복 껍데기를 마주할 때면 전복 공납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 유물 촬영하다가 전복 껍데기가 유난히 크다는 것을 느꼈다. 유심히 봤더니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북방전복(참전복)이 아니라 제주도 연해에 서식하는 둥근전복과 말전복이었다. 제주 바다는 큰 전복이 자생하는 축복받은 곳이지만 잡아서 바쳐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둥근전복과 말전복은 북방전복보다 깊은 곳에 서식하므로 더 힘들게 잠수해서 잡았을 것이다. 어렵게 잡은 전복을 그들은 먹지 못했고, 도망갔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복#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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