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묻는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13〉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18 03:00수정 2021-09-18 03:0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
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
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
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
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
소리의 아름다움과
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
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힐 때쯤
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
나는 나를 묻는다
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
올라온다
―이영유(1950∼2006)

우리가 이 시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가장 즉각적인 이유는 지금이 가을이라는 것이다.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라는 첫 구절을 이 계절에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다.

이 시는 이영유 시인의 마지막 시집에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맨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다. 시의 주인은 암 투병을 하며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시집이 나왔을 때, 시인은 세상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나를 묻는다’는 시가 왜 마지막 시집, 마지막 페이지에 있어야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시인의 후배는 주인 잃은 유고를 추리며 시집을 묶었는데 그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하게 된다. “나는 이영유처럼 철저하게 망가진 인간을 보지 못했다. 그는 시를 망쳤고, 삶을 망쳤고, 나중에는 몸까지 망쳐버렸다. 그는 실패자다”라고 해설을 붙였다. 해석하자면, 이영유 시인은 뼛속까지, 철저하게 시인이었다는 말이다. 이 해설을 쓴 후배는 시인을 진짜로 사랑한 사람이구나, 그의 작품을 아꼈구나 알 수 있다.

한 실패자가 세상 끝나는 날, 이런 시를 썼다. 저렇게 아름다운 것들만 눈에 담았다. 찬란한 것들을 쌓아 올리고 그 아래 몸을 뉘었다. 시를 보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실패란 무엇이고 성공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성공을 원했던 것일까.

주요기사

나민애 문학평론가
#나를 묻는다#가을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