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박지원 국정원장의 5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6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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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에 조성은과 야권 인사들 불러들여
다섯 시간 넘게 ‘사찰 정보’ 밝힌 정황
北이 통신선 끊은 엄중한 시기에도
‘私的 얘기’ 국정원장에 안보 맡길 수 있나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시간은 가볍지 않다. 그는 의원 시절인 2019년 8월에도 “일본 오사카에 와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과 5시간 45분 의견을 교환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들어간 엄중한 시기에 집권 자민당 2인자와 묵직한 대화를 나눴다는 의미다.

국정원장의 5시간이 ‘고발 사주’ 의혹 제보자 조성은의 페이스북에 등장한다. 2월 15일 “어제 다섯 시간 넘게 나눴던 말씀이 생각나서 엄청 웃었네”라고 썼다. 다 공개하면 이혼할 사람 많을 거다. 제대로 한판 해볼까? 하면 십리 밖으로 줄행랑칠 것들이 같은 박지원 발언까지 옮겼다. ‘쪽수가 안 되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쪽’이 꼭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쓴 걸 보면 박지원은 야당 인사들의 내밀한 정보를 발설했을 공산이 크다.

2월 14일이면 설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이다. 휴일이지만 국정원장이 국민의당 전직 의원들과 ‘똑똑한 신세대 후배’ 조성은을 공관에 불러 다섯 시간 넘게 희희낙락한 사실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그 직전 ‘이명박 국정원’이 의원 등 각계 인사 1000여 명을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월 10일자 동아일보는 “누가 어느 호텔에 들어갔다는 것까지 문건에 담겨 있는 것으로 안다”는 여권 핵심 관계자의 말을 보도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대선주자가 최근 확인했듯, 박지원이 2월 정보위에서 밝힌 비공개 발언과 똑같은 소리를 외부인에게 했다는 건 국정원장 자격을 의심케 한다. 국정원은 여당의 사찰 정보 ‘목록’ 공개 요구조차 개인정보보호법에 저촉될 수 있다며 거부한 바 있다. 국정원장이 대놓고 개인정보보호법과 국정원 보안안보규정을 어긴 꼴이다.

조성은 말마따나 박지원이 공개되면 이혼할 내용을 쥐고 제대로 한판 한다면, 당사자들은 선거 출마나 공직에 나섰더라도 줄행랑칠지 모른다. 그게 바로 국정원의 공작정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출범 전부터, 박지원은 작년 말 국정원 개혁을 브리핑하며 “앞으로 국정원의 정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 짓인 거다.

‘윤석열 검찰’이 야당 의원에게 윤석열 당시 총장 관련 사건을 고발하라고 시켰다는 조성은의 언론 제보는 철저히 수사할 일이다. 여당 의원인 법무부 장관 박범계의 국회 발언대로 국민의힘 대선주자 “윤석열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그러나 조성은이 ‘핵심적 증거’라는 휴대전화 이미지 파일을 몽땅 내려받은 다음 날(8월 11일) 박지원을 만난 것은 ‘뉴스공장’ 김어준 식으로 표현하면, 냄새가 난다.

그날은 조간신문 1면마다 북한 김여정이 남북통신선을 끊었다는 기사로 도배된 날이다. 그 엄중한 시기에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며 ‘사적 얘기’만 했다는 국정원장에게 국가안보를 맡겨도 되는지는 의심스럽다. 더구나 그들이 만나기 일주일 전엔 국정원장 사퇴설까지 나돌았다. 7월 말 국정원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 혐의자들을 검거하자 국정원 실력자가 박지원을 못마땅해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정원장의 충성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 점심시간은 가볍지 않다. 조성은이 “9월 2일이라는 (보도) 날짜는 사실 우리 (박지원) 원장님이나 제가 원했던, 배려 받아서 상의했던 날짜가 아니다”라고 불쑥 말할 만한 무게가 있다.

정신분석가인 정도언 서울대 명예교수는 “말실수는 ‘덮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불쑥 튀어나온 것”이라고 어제 동아일보 칼럼에 썼다. 이런 말실수는 그 사람이 살아온 길에 쌓여 있는 관련 자료와 비교해 검토하면 객관적 해석에 접근할 수 있다고 ‘답안’까지 알려줬다.

조성은은 당원가입서 등을 위조해 청년정당 창당을 시도한 전력이 있다. 박지원의 살아온 길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열린민주당 의원 김의겸이 기자 시절 ‘박지원, DJ(김대중)를 세 번 부인하다’라는 칼럼을 썼을 정도다. 정치 개입을 근절한다면서 대선까지 갈 국정원장에 ‘정치 9단’을 앉힌 문 정권의 의도와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친여단체 고발장을 접수한 지 나흘 만에 윤석열을 피의자로 전격 입건했다. “죄가 있냐 없냐는 나중 문제”라는 말실수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조성은과 박지원도 국정원법, 공직선거법,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공수처는 윤석열 수사와 똑같은 속도와 강도(强度)로 두 사람을 수사하기 바란다. 죄가 있냐 없냐는 나중 문제다.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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