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냐 활력이냐, 다민족의 길[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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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괴물도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인간이 협잡과 음모를 일삼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권력 지향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정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정치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고대 지중해 지역 그릇에 그려진 그리스 신화의 괴물 ‘키메라’. 기원전 350∼340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대 지중해 지역 그릇에 그려진 그리스 신화의 괴물 ‘키메라’. 기원전 350∼340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괴물도 정치적 동물이다. 인간과는 다른 의미에서. 인간이 상상한 괴물의 역사와 계보는 다채롭고 뿌리 깊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는 머리는 사자, 몸은 염소나 양, 꽁무니는 뱀 혹은 용으로 이루어진 괴물이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셋이다. 이러한 연유로, 생물학에서는 하나의 생물체 안에 다른 유전 형질을 가진 여러 가지 세포가 함께 존재할 때 그것을 키메라 현상이라고 부른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괴물을 묘사한 1511년 목판화 작품. 사진 출처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알브레히트 뒤러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괴물을 묘사한 1511년 목판화 작품. 사진 출처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13장에도 괴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요한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한 짐승을 목도한다. 그 짐승은 머리가 일곱 개이고 뿔이 열 개이고, 뿔에는 열 개의 왕관이 있다. … 또 요한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본다. 그 짐승은 양 같은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 요한계시록의 이 대목을 묘사한 그림은 제법 많은데, 그중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1511년 그림을 보자.

이 생명체가 괴물처럼 보이는 것은 그 생김새의 부조화 때문이다. 양의 뿔을 가지고 있으나 정작 얼굴과 몸은 양이 아니다. 몸이 하나라면 머리도 하나일 것 같은데, 정작 머리가 일곱 개나 달렸다. 머리가 일곱이라면 왕관이 일곱 개여야 할 것 같은데, 왕관을 두 개나 쓴 머리들도 있다. 왕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이 괴물은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했다.

국가는 종종 하나의 몸에 비유되어 왔건만, 이 국가는 왜 이토록 괴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단 말인가. 단일민족국가 신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은연중 하나의 국가에는 하나의 민족이 있어야 하고, 하나의 민족에는 하나의 정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던 와중에 하나의 몸에, 여러 개의 머리, 그보다 더 많은 왕관을 쓴 존재를 보면 당혹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 괴상해 보이는 국가는 다름 아닌 제국이다. 제국은 커다란 덩치와 다양한 민족 구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학자들은 유별난 다민족 제국에 대해 괴물의 비유를 사용하곤 했다. 한반도, 중국, 소비에트 연방 등 여러 경계에 걸쳐 있는 다민족을 통치한답시고 일본 관동국은 1931년에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세웠다. 실질적으로 일본 제국이 통제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이 만주국의 황제로 내세웠다.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무로 신이치는 이 부자연스러운 나라를 탐구한 책에 “키메라―만주국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관동군에 의해 느닷없이 끌려와 만주국 황제의 지위에 올라야 했던 푸이는 원래 청나라의 황제였다. 역사학자 구범진은 복잡한 민족 구성을 가진 청나라를 다룬 저서에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17세기에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나라는 한족 중심의 명나라에 비해 그 국가 성격이 사뭇 달랐다. 일단 영토가 명나라의 두 배나 되었고, 확대된 영토에 걸맞게 티베트, 위구르 무슬림, 버마, 몽골, 타이 사람들을 신민으로 포괄했다. 그러니 하나의 몸에 여러 유전 형질이 공존한다는 키메라에 청나라를 비유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몸집을 불린 제국이 대외적으로 막강한 힘을 발휘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괴물 같은 존재를 다스리는 일이 쉬울 리가 있겠는가. 딴살림을 차리고 살던 이들을 한 지붕 아래 모이게 했을 때 생겨날 갈등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청나라는 민족들 간 조화를 꾀하고, 제국으로부터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정치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소수민족 문제의 뿌리는 청나라의 제국적 성격에 그 원인(遠因)이 있다.

다민족 국가 통치의 어려움을 표현한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판데르 보르흐트의 1578년 에칭 작품. 사진 출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다민족 국가 통치의 어려움을 표현한 플랑드르 화가 피터르 판데르 보르흐트의 1578년 에칭 작품. 사진 출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홈페이지
다민족 국가를 다스리는 일의 어려움은 피터르 판데르 보르흐트의 1578년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온갖 짐승들의 머리가 달려 있는 거대 괴물을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이 당혹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이 괴물은 다민족 제국의 여정을 시작하던 16세기 후반의 (오늘날) 네덜란드를 상징한다. 그러나 다민족 국가가 반드시 통치의 어려움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잘만 소화하면 그것은 활력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유럽 각국이 가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의 길림길에서 탄압과 전쟁을 일삼고 있을 때, 네덜란드는 적극적으로 관용 정책을 택했다. 그에 따라 칼빈주의자뿐 아니라 가톨릭, 루터교, 유대교, 재세례파 신자 등 타국에서라면 이교도로 낙인찍혀 핍박을 받았을 인재들이 네덜란드에 몰려와 살게 되었다. 17세기 초 암스테르담 인구의 40%를 이민자가 차지할 정도였다. 다양해진 인구 구성을 장애물이 아니라 활력으로 승화시켰을 때, 네덜란드는 본격적인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향유하고 표방해 온 다양성과 자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괴물#활력#다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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