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일궈온 미역바위[김창일의 갯마을 탐구]〈66〉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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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호미와 긴 막대기에 날카로운 날이 부착된 도구를 들고 해녀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십 명이 일주일 넘게 같은 행동을 반복했으나 여느 때와 달리 한결같이 빈손이었다. 한나절을 물밑에서 바위 표면만 긁었으니 그럴 수밖에.

입동 전후로 매년 반복하는 이 일을 동해안 주민들은 기세작업 혹은 돌매기, 돌깎기, 개닦기, 짬매기라 하고, 제주도에서는 바당 풀캐기라 한다. 풀을 뽑듯 미역바위에 붙은 패류나 잡조류를 없애는 일종의 김매기다. 바위를 깨끗이 해 미역 포자의 안착을 돕고, 뿌리 부착력을 높여 파도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다. 울산, 부산 기장, 경북 경주·포항 등이 미역바위 청소에 힘을 기울이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돌미역은 주변에 비해 높은 가격에 판매된다. 특히 울산 미역은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편에서는 수라상에 오르는 미역이라 했고, 조선왕조실록은 울산 곽전미역을 진상하는 미역이라 했으며, 만기요람(萬機要覽)은 울산 미역의 품질이 좋아 가격이 높다고 했다.

미역바위는 곽암(藿巖), 짬 등으로 불리는데 울산 판지마을에는 천년 동안 돌미역을 채취해 온 유서 깊은 곽암이 있다. 일렁거리는 파도에 거무스름한 갯바위 봉우리가 살짝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수면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에게 곽암, 양반돌, 박윤웅돌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울산광역시기념물 제38호(2001년 12월 20일 지정)이기도 하다. 물에 잠긴 바위를 기념물로 지정한 것이다. 흥려승람(興麗勝覽)에 따르면 박윤웅은 울산 박씨 시조로 나말여초 때 울산지역 토호였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지방 호족세력을 정비할 때 협조해 곽암 12구를 하사받았다. 그 후 조선 영조 때 울산 박씨 문중이 대대로 소유하던 바위 12구를 환수시켰는데 3년 내내 흉작이 들자 1구를 되돌려줘 일제강점기까지 소유권이 이어졌다. 지금도 판지마을 주민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미역바위를 깨끗이 청소해 상품성 좋은 돌미역을 생산한다.

판지마을과 이웃한 제전마을은 다른 지역 해녀까지 동원한다. 그만큼 미역바위 청소가 생산량과 품질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제전마을은 해녀 50∼60명이 동시에 입수해 바위를 긁어낸다. 주민들은 해녀를 위해 식사 준비를 하고 무뎌진 호미를 갈아 날을 세우는 등 마을 전체가 들썩인다. 마을 인구 150여 명 중 100여 명이 참여하는 마을 최대 행사다. 딱방개안, 가마돌, 배돌, 소고동, 옥수방 등 수많은 미역바위 이름을 주민들은 줄줄 외고, 위치와 넓이, 수심까지 꿰고 있다. 대대로 물려받은 마을 공유 자산인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에 많은 갯바위를 폭파시켜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단다. 울산의 제전마을, 판지마을, 복성마을, 우가포 등은 돌미역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유행처럼 갯바위를 미역밭으로 만들었다. 육지에서 경작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재배하는 것처럼 어민들은 미역바위를 가꾸어 왔다. 정성을 들인 만큼 돌미역은 파도를 이겨내고 바위를 새까맣게 뒤덮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손길의 힘이 바다 아래에도 닿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창일 국립제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천년#미역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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