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왜 언제나 할 일이 많은가[클래식의 품격/인아영의 책갈피]

인아영 문학평론가 입력 2021-09-07 03:00수정 2021-09-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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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 문학평론가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스바와 쉼보르스카(1923~2012)의 시가 근래 회자되었던 계기 중 하나는 영화 ‘벌새’(2019)였던 것 같다. 중학생 은희는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갑자기 사라진 한문 학원의 영지 선생님으로부터 뒤늦은 편지를 받는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돌아가면 모두 다 이야기해줄게.” 그러나 영지 선생님은 성수대교 붕괴로 세상을 떠나고 은희는 그 비어있는 이야기를 품은 채 혼자 남겨진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쉼보르스카의 시를 떠올리게 한 것은 시선집 ‘끝과 시작’(문학과지성사, 2007)에 실린 ‘언니에 대한 칭찬의 말’ 때문이다. “우리 언니는 시를 쓰지 않는다./아마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그녀의 유일한 글쓰기는 여름 휴양지에서 보낸 엽서가 전부다./엽서에는 매년 똑같은 약속이 적혀 있다:/돌아가면/이야기해줄게./모든 것을./이 모든 것을.” 어쩌면 ‘나’는 언니가 여름 휴양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엽서를 매년 읽는 것일까? 이 시에는 끝내 언니가 말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의 그리움이 묻어나 있다. 시인은 아마도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오래 생각해온 사람임에 틀림없다.

1923년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쉼보르스카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습을 피해 지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1943년부터는 철도 직원으로 일하면서 독일로 강제 추방되지 않을 수 있었다. 시인으로서 경력을 쌓은 것은 이 시기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잔혹한 전쟁을 가까이에서 겪은 쉼보르스카의 초기 시에는 살아남은 사람의 황망하고 비참한 심정이 곳곳에 녹아있다. 미발간 원고를 모은 시집 ‘검은 시집’(문학과지성사, 2021)에 실린 ‘돌아온 회한’(1947)에도 그 심정은 “먼지보다 하찮은 순간들로/나는 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시구로 적힌다. 숲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었고 하늘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채 구름만 흘러가는 종전 후의 시간. 너보다 오래 살아남은 이 시간이 먼지보다 하찮을 뿐이라는 상념으로부터 도망갈 길은 없어 보인다.

반세기가 지난 뒤의 시에도 남겨진 사람의 그리움이 짙게 남아있는 까닭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어마어마한 파괴력 때문이겠지만,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도무지 잊지도 놓지도 못하는 시인의 성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쉼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시인은 언제나 할 일이 많습니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시인은 왜 언제나 할 일이 많은가? 어떤 그리움은 떠나간 사람이 끝내 하지 않은 말을 매번 새로운 언어로 적는 일로만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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