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유재동]시대에 역행하는 기본권 제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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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서 투표 어렵게 하는 입법 쏟아져
개혁 앞세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유재동 뉴욕 특파원
유재동 뉴욕 특파원
요즘 미국에선 ‘보수의 아성(牙城)’으로 불리는 텍사스주가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최근 시행된 낙태제한법과 함께 지난달 말 주의회가 통과시킨 개정 투표법이 미 전역에서 거센 논란을 일으키고 있어서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권 행사를 어렵게 하는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가령 앞으로는 차에 탄 채로 하는 드라이브스루 투표, 야간·새벽 투표가 금지된다. 선거관리 직원은 유권자가 요청하지 않는 한 부재자투표 신청 용지를 보내거나 우편투표를 장려하지 못한다. 영어를 모르는 유권자의 투표를 도와주는 것에도 제한이 생긴다.

텍사스주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올 들어 18개 주에서 30건이 넘는 투표권 제한 입법이 쏟아졌다. 조지아주에선 투표를 위해 줄을 선 유권자에게 물이나 음료를 제공하는 행위까지 금지했다. 플로리다주는 부재자투표 신청을 선거 때마다 새로 하도록 규정해 선거 참여를 아주 번거롭게 만들었다. 이런 투표법 개정을 밀어붙이는 공화당 측은 “엄격한 투표 관리로 부정선거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한 저소득층과 유색인종 투표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이 우려스러운 것은 많은 시련 속에서도 투표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흘러 온 미국 역사의 흐름이 다시 과거로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만 해도 미국에서 투표를 하려면 1인당 20∼30달러의 세금을 내고, 문해(文解)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도 통과해야 했다. 이런 절차는 사실상 흑인과 이민자들, 저소득층의 투표권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지금은 이런 제도적 장벽이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게 유권자가 되더라도 선거당국에 ‘유권자 등록’을 해야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조항이다. 이 제도 역시 처음엔 부정선거를 막겠다며 도입됐지만, 생계 문제 해결이 급한 빈곤층과 유색인종 투표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이처럼 미국에서 투표권을 더 보장하기는커녕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산에서 비롯됐다. 작년 대선에서 우편투표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 트럼프는 근거 없는 음모론을 양산한 끝에 급기야 대선 불복을 선언했다. 실제 이렇다 할 선거 부정이 없었다는 건 그의 ‘충복’이었던 법무장관의 수사 결과에서도 확인됐다. 그럼에도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이 여전히 공화당 지지자들 중 절반을 넘는다. 미국 민주주의의 근본을 흔들고 있는 이런 뿌리 깊은 갈등과 혐오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트럼프는 재임 시절 투표권 말고도 ‘언론의 자유’라는 기본권도 흔들었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적으로 간주하고 공개 비난하는가 하면, 불리한 보도에 대해선 정보 유출자를 색출하겠다며 기자들의 통신 기록까지 뒤졌다. 지금 한국에서도 언론 보도를 위축시키는 법안 마련이 추진되고 있다. 극렬 지지자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기자들을 괴롭히고 조롱, 협박하는 상황도 두 나라가 비슷하다. 이런 현상의 배경은 제각각이겠지만 본질은 같다. 개혁을 명분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불신과 증오를 악용해 상대를 모두 ‘부정 투표자’나 ‘가짜뉴스 생산자’로 낙인찍는 정치적 프레임이다. 그런 공방을 이어가는 사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대들보는 썩어가고 있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jarrett@donga.com



#기본권 제한#미국#텍사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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