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마비로 접은 체육교사 꿈… 그는 대신 탁구 세계챔피언이 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5일 14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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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영대.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기자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영대.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신한불란(信汗不亂)’. 땀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장애인 탁구 대표 주영대(48·경남장애인체육회)는 자신이 좌우명을 삼고 있는 이 네 글자를 가슴에 품고 2020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개최지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그리고 남자 단식 TT1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그는 다시 땀을 믿게 됐다.

경남 사천시에서 태어난 주영대는 원래 체육 교사가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운동장에서 땀 흘리기를 좋아하던 주영대였다. 그러나 경상대 체육교육과에 재학 중이던 1994년 여름 교통사고를 당해 사지마비가 찾아왔다.

4일 오전 일본 도쿄 미나토구(港區) 베이사이드 호텔 아주르 다케시바(竹芝) 내 ‘코리아 하우스’에서 만난 주영대는 “처음 다치고 나서 4년 정도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웹 디자이너로 일하던 중 진주시장애인종합복지관 개관 소식을 듣고 재활 목적으로 탁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라켓을 잡지도 못하는 데 탁구를 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라켓과 손을 붕대를 묶고 시작하면서 ‘아, 나도 이거는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사고 이후 14년 만에 주영대는 다시 흠뻑 땀을 흘릴 수 있게 됐다.

2020 도쿄 패럴림픽 탁구 남자 단식 TT1 경기를 치르고 있는 주영대.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 패럴림픽 탁구 남자 단식 TT1 경기를 치르고 있는 주영대.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제 주영대의 탁구 실력은 그냥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삼두박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이들이 휠체어를 타고 진행하는 탁구 TT1 종목에서는 전 세계 어디에도 주영대보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없다. 주영대는 장애를 얻으면서 평범한 체육 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세계 챔피언이 됐다.

주영대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 때는 금메달을 딸 거라고 90% 생각하고 갔다. 그런데 은메달을 따서 너무 아쉬웠다”면서 “이번에는 몸이 좀 안 좋아서 4강 정도만 생각해고 왔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탁구가 더 잘 되더라”고 말했다.

이어 “(장애인) 탁구에도 그랜드슬램이 있다. 패럴림픽, 세계장애인선수권대회, 장애인아시아경기, 아시아장애인선수권대회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면 그랜드슬램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아직 세계선수권 금메달이 없다. 내년에 세계선수권이 있는데 꼭 금메달을 따서 그랜드슬램을 이루고 싶다”고 밝혔다.

주영대가 그랜드슬램을 완성하려면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에서 한솥밥을 먹는 동료 선수들을 이겨야 한다. 이번 대회 남자 TT1 단식에서는 금메달을 딴 주영대에 이어 김현욱(26·울산장애인체육회)이 은메달, 남기원(55·광주광역시청)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0 도쿄 패럴림픽 탁구 남자 단식 TT1 금·은·동 메달을 싹쓸이한 한국 대표팀. 왼쪽부터 김현욱, 주영대, 남기원.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 패럴림픽 탁구 남자 단식 TT1 금·은·동 메달을 싹쓸이한 한국 대표팀. 왼쪽부터 김현욱, 주영대, 남기원.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주영대는 “TT1 등급 선수끼리는 원래 자주 뭉치는 사이다. 합숙 훈련하면서 서로 금·은·동 메달 세 개를 다 따자고 약속을 하고 왔다. 그 약속을 이룬 건 매우 기뻤다”면서 “장애인 탁구는 선수도 많고, 실업팀도 많다. 그렇다 보니 국내 선수끼리 경쟁을 하면서 자연스레 실력이 좋아진 것 같다. 양궁처럼 세계 랭킹과 한국 랭킹이 엇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선수 생활 와중에 경남장애인탁구협회 사무국장, 진주시장애인탁구협회 부회장 등을 겸임하기도 했던 주영대는 “탁구 선수들 가운데 고령자가 많다. 탁구에도 젊은 선수들이 나와서 앞으로 명맥을 이어갔으면 좋겠다”면서 “나도 이제 나이가 많으니 노하우 등 전수해서 TT1, TT2 등급에서 한국이 계속 세계 최강이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현욱은 탁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저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제가 긴장을 덜 해서 이겼을 뿐 김현욱이 실력이 부족해서 진 게 아니다”면서 “요즘에는 장애인 스포츠 기반이 잘 잡혀 있고 전문 코치들도 많아서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장애가 있다고 방 안에만 갇혀 있을 이유는 없다. 여러분 자신에게 땀 흘릴 기회를 주라”고 조언했다.


도쿄=황규인기자 kini@donga.com·패럴림픽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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