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 빠진 남자 “자료수집에 20억…100살까지 공 차는게 목표”[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4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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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씨는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탓에 지방을 돌며 축구를 하고 있다.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이재형 씨는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탓에 지방을 돌며 축구를 하고 있다.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축구 자료수집가 이재형 씨(60)는 매주 공을 차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 일요일인 4일에도 충북 제천에서 서울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 소속으로 제천60대 팀하고 경기를 했다.

“제가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났어요. 집 뒤에 공터가 있었는데 동네 형 동생들과 매일 공을 차면서 놀았어요. 성북초교 다닐 때 아마추어 축구팀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죠. 인근에 홍익중과 경신중이 있었죠. 당시엔 속칭 뺑뺑이(추첨)로 중학교에 가는데 축구명문 경신중을 갔더라면 전 축구선수가 됐을 겁니다.”

이 씨는 홍익중을 가면서 축구를 사실상 그만 두게 됐다. 축구를 하지 못해 우울했다. 하교 때 매번 경신중 축구부 훈련 및 경기 모습을 1시간씩 보고 집으로 갔다. 축구를 못하는 대신, 고등학교 때부터 축구 자료를 수집하게 됐다.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축구를 하고 싶었는데 못하니 다른 것에 눈을 뜨게 됐죠. 축구에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 겁니다. 처음엔 축구 저금통, 우표 등을 수집했습니다.”

그가 다시 축구를 시작한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서울 숭인동 명우축구회를 만나면서다. 당시 조기축구회는 30대 청년부와 40대 장년부가 있었다. 27세에 가입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경기를 뛰지는 못했고 매일 훈련만 했다.

“제가 열심히 했더니 조기회 홍보실장으로 임명했어요. 제가 대한민국 최초로 조기축구 신문도 만들었죠. 12페이지짜리 명우소식이란 신문을 1000부 찍어 회원들은 물론 상태팀 선수들에게 돌렸습니다.”

이재형 씨(왼쪽)가 세계적인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와 찍은 모습. 2010년 FC 바르셀로나 한국 방문 때 찍었다. 이재형 씨 제공.
이재형 씨(왼쪽)가 세계적인 축구스타 리오넬 메시와 찍은 모습. 2010년 FC 바르셀로나 한국 방문 때 찍었다. 이재형 씨 제공.

이 씨는 30대 때 종로구 대표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종로구에 15개 동호회 팀이 있었는데 전국대회를 나가려면 대표를 선발해야 했다. 그는 요즘 4개 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을 비롯해 용두축구회, 조이(JOY)축구단, 그리고 성북초교 선후축구회(성북초교 선배 후배 축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이축구단은 과거 축구선수 출신들 모임이다. 박경훈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비롯해 이태호 강동대 교수, 이흥실 김천 상무 단장, 전 할렐루야 선수 출신 김정희 씨 등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씨는 한 때 국가대표 출신들이 활약한 영서축구단도 만들었다. 영서축구단은 K4 서울 유나이티드로 바뀌었다. 이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 19) 탓에 집합이 금지되는 바람에 수도권에서 축구를 못해 지방 원정에 가는 팀을 따라가서 매주 축구를 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오기 전에는 주 3회 축구를 했어요. 주중에 1회, 토요일과 일요일. 지금은 주말에 1번밖에 축구를 못해 안타깝습니다.”

축구가 왜 좋을까? “축구를 하고 나면 보약을 몇 재는 먹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몸도 좋아지고 또 성취감도 있습니다. 제가 오른쪽 날개를 보는데 매 경기 골을 터뜨립니다. 공이 제 발끝을 떠나 골네트에 꽂히는 순간,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제가 조기축구 회원으로 평생 터뜨린 골이 3000골 정도 됩니다. 축구황제 펠레가 1200여골 넣었으니 제가 펠레보다 많이 넣었습니다. ㅎㅎ.”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매 경기 최소 2골을 터뜨린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선수 생활했던 감각이 아직 살아있다고 했다. 그는 매일 서울 집(성북구 보문동) 근처 낙산공원을 1시간씩 달린다. 체력이 없으면 축구를 못하기 때문이다. 축구는 하체 발달에 큰 도움이 된다. 조기회 룰에 따라 전후반 25분을 소화하려면 심폐 지구력도 있어야 한다. 그는 축구를 하면서 가끔 걸리는 감기 외에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다.

이 씨는 1996년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면서 자료 수집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취미가 직업이 된 것이다. 월드컵 개최 기념으로 1997년 아크리스백화점에서 소장하고 있던 축구자료를 전시했다.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기념품 수준의 것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유물’이 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계기가 됐다.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때 안정환의 골든 볼, 스페인과의 8강 승부차기 때 마지막 키커 홍명보가 찬 공을 각각 에콰도르와 이집트까지 날아가서 찾아왔다. 45개국을 돌아다니며 4만여 점을 모았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료 구입비와 여행비에 썼다. 30년 넘게 약 20억 원을 썼는데도 아깝지 않다. 코로나 19가 사라지면 다시 축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해외로 떠날 계획이다. 사재를 털어 축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떠나지만 새신랑이 신혼여행 가듯 행복하기만 하단다. 참고로 그는 아직 솔로다.
이재형 씨(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으로 활약하며 찍은 단체 사진. 이재형 씨 제공.
이재형 씨(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동대문구60대축구단 상비군으로 활약하며 찍은 단체 사진. 이재형 씨 제공.

“전 100살까지 공을 차는 게 목표입니다. 축구를 하려면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모여서 소통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골을 차면 서로 몸을 부딪쳐야 합니다. 그 재미도 좋습니다. 그렇게 공을 차다보면 심신이 건강해집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만 둘 순 없죠.”

그는 축구자료 수집가란 타이틀도 명예로 생각한다.

“축구선수가 됐다면 축구자료를 수집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자료수집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축구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축구 얘기만 나오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는 축구 박물관을 짓는 게 꿈이다.


제천=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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