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반역자로 몰린 스파이… 그의 마지막 임무는

이호재 기자 입력 2021-09-04 03:00수정 2021-09-0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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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러너/존 르 카레 지음·조영학 옮김/368쪽·1만6800원·알에이치코리아
영국 작가 존 르 카레(왼쪽 사진)와 정보국의 현장 요원이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 러카레이는 장편소설 ‘에이전트 러너’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브렉시트에 대한 실망감과 분노를 드러낸다. 알에이치코리아 제공
전성기를 넘긴 중년 남성의 삶은 고달프다. 직장에선 머리 회전이 빠른 후배와 승승장구하는 상사 사이에 끼여 제자리를 찾기 힘들다. 아이는 아빠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아내는 쌀쌀맞다. 그때 마음에 쏙 드는 청년 남성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나를 떠받들어 주고 내 말에 공감해 주는 청년이라면 맥주 한잔하며 힘든 가정과 일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고 싶지 않을까. 설사 한때 잘나갔던 ‘스파이’라도 이런 유혹을 뿌리치진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첩보 소설의 제왕인 영국 작가 존 르 카레(1931∼2020)가 2019년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25번째 장편소설이다. 르 카레는 스파이 출신이다. 냉전 시대 영국 해외 정보국에서 첩보 요원으로 활동한 뒤 그 경험을 살려 소설을 써왔다. 독일을 무대로 스파이의 인간적 고뇌와 세밀한 심리를 그린 장편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열린책들), 박찬욱 감독이 2018년 영국 BBC와 만든 동명의 드라마의 원작인 장편소설 ‘리틀 드러머 걸’(알에이치코리아)로 유명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다시 스파이의 인생을 그렸다.

소설은 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마흔일곱 살 남성 내트는 영국 정보기관 소속 요원이다. 내트는 오랫동안 해외 현장을 전전한 뒤 막 런던으로 복귀한 참이다. 요원들이 활발히 첩보 활동을 하던 냉전 시대는 진즉 끝났다. 내트는 간부가 되지 못하고 한직으로 발령받았다. 조국을 위해 살았건만 조국의 인정을 받지 못한 내트의 마음은 착잡하다. 출장이 잦은 업무 때문에 친해지지 못한 딸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눈초리도 따갑다. 내트에게 남은 건 오직 매주 다니는 배드민턴 클럽밖에 없다. 취미생활에서 삶의 낙을 찾는 것이다.

그런 내트에게 어느 날 젊은 에드가 다가온다. 훌륭한 배드민턴 실력에 재치 넘치는 언변을 갖춘 에드에게 내트는 점점 빠져든다. 내트는 자주 에드와 함께 치열하게 배드민턴을 치고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곤 한다. 그러나 이 행동 때문에 내트는 반역자로 몰릴 위기에 처한다. 내트의 동료에 의해 에드가 타국의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 결국 내트는 조국에 다시 한번 충심을 입증하기 위해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내트는 과연 ‘에이전트 러너’(현장 요원)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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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볼 점은 이 작품이 2016년 영국 국민들이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이후의 시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르 카레는 2019년 사망하기 전 브렉시트에 분노해서 아일랜드 국적을 땄을 정도로 당시 영국의 선택에 비판적이었다.

르 카레는 소설에서도 내트의 목소리를 통해 “난 뼛속까지 유럽인” “브렉시트는 그야말로 헛발질”이라며 브렉시트를 정면 비판한다. 조국에 헌신했으나 조국의 인정을 받지 못해 좌절했던 내트처럼 한때 조국에 몸을 바쳤던 르 카레는 조국의 선택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죽음을 앞둔 거장은 마지막까지 제 목소리를 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반역자#스파이#브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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