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태아 심장박동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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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낙태 허용 시기를 결정할 때 제기되는 질문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생명은 잉태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낙태는 살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선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임신 22∼24주를 기준으로 조건부 낙태를 허용한다. 그런데 미국의 생명운동가들이 2013년 태아의 심장이 뛰는 순간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박동법’을 제안했다.

▷1일 미 텍사스주에서 발효된 심장박동법은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처벌한다. 의학적 긴급 상황만 제외하면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일 때도 낙태할 수 없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은 사후 피임을 할 수 있고, “강간범 잘못인데 왜 태아를 처벌하느냐”는 논리에서다. 아칸소 조지아 앨라배마 등 보수 성향의 10여 개 주의회가 비슷한 법을 만들었는데 주 또는 연방 법원에 의해 효력이 중지되거나 폐지됐다.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 22∼24주 이전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임신을 알아채기 어려운 6주 이후 낙태 처벌은 사실상 전면 낙태 금지라며 반발한다. 초음파로 감지되는 태아의 심장 박동은 전기적 충격일 뿐 심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적으로는 위헌이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루스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사망 후 후임으로 에이미 배럿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대법원이 보수 우위로 재편된 것이 새로운 변수다. 배럿 대법관은 아이티에서 입양한 2명과 다운증후군 막내를 포함해 자녀 7명을 둔 가톨릭 신자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중단해달라는 긴급 신청을 기각했다.

▷국내에선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 입법 시한을 지난해 12월 31일로 정했지만 지금껏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개정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여성계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대한신생아학회는 요즘은 22주 된 태아도 살릴 수 있다며 22주 미만으로 하자고 한다. 임신 11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한국형 심장박동법도 발의됐다.

▷의료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낙태 가능 주수와 비용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A병원은 22주까지만 된다고 하고, 7주 낙태에 B병원은 48만 원, C병원은 75만 원을 부른다. 경구용 낙태약 허가가 늦어지면서 온라인에선 불법 판매가 횡행한다. 입법 공백을 9개월째 방치하는 무책임한 국회 탓에 위험에 내몰리는 여성들만 늘어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태아 심장박동법#생명#낙태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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