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이건희 5000억’ 감염병병원 기부 넉달째… 관리위도 못꾸린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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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4차 유행]복지부 “기존 예산 처리 확정후 논의”
기재부, 설계 착수 예산 전액 삭감… ‘적정성 검토’에만 짧아도 6개월 소요
병원 준공 2027년 이후로 미뤄질듯, “메르스때처럼 또 유야무야 되나”
의료계, 정부 소극적 자세 질타… 중앙의료원장도 “정책의지 실종”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족이 “감염병 대응을 위해 써 달라”며 7000억 원을 기부한 지 넉 달이 지났지만 구체적인 활용 방법을 논의할 위원회조차 구성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오히려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을 위해 기존에 배정됐던 정부 예산이 삭감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감염병에 대한 장기 대책 마련이 절실한데도 정부가 민간 기부조차 방치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예산 배정 문제로 병원 건립 ‘스톱’
이 회장 유족은 올 4월 의료 분야에 써 달라며 1조 원을 기부했다.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 국립중앙의료원은 그중 7000억 원을 받아 5000억 원은 중앙감염병병원 건립에, 2000억 원은 코로나19 백신 등 감염병 연구에 쓰기로 했다. 나머지 3000억 원은 소아암과 희귀질환 환자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기부됐다.

중앙감염병병원은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대유행) 때 환자 치료, 격리, 연구에서 중추 역할을 하는 전문 의료기관이다. 정부는 2026년까지 중앙감염병병원을 100병상 규모로 준공하겠다며 1294억 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여기에 이 회장 유족의 기부금이 더해지면서 의료계는 감염병 전문 의료기관의 규모와 수준을 대폭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24일 동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복지부는 중앙감염병병원의 구체적인 건립 방향을 포함해 기부금 7000억 원의 운영 방안을 논의할 ‘기부금관리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6월에 위원회 운영을 시작했어야 하지만 아직 위원 선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복지부 관계자는 “거액의 기부금이 새로 들어온 만큼 기존 정부 예산을 어떻게 할지 확정해야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기부금 7000억 원은 3개월 넘게 은행 계좌에서 잠자고 있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내년에는 중앙감염병병원 건물 설계와 전산 시스템 구축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최근 관련된 예산 10억 원을 전액 삭감했다. 기재부는 앞으로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를 실시해 병원 건립 예산의 삭감 여부를 심의할 예정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총사업비가 확정돼야 설계비도 책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에 짧아도 6개월이 소요되는 만큼 이를 감안하면 병원 준공 시점은 2027년 이후로 미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 의료계 “탁상 행정으로 발목 잡나”
의료계는 정부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하고 있다. 이 회장의 유족 측이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을 지어 달라’고 따로 요청한 만큼 정부 예산의 집행 여부와 상관없이 서둘러 건립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간 기부금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이미 세워놓은 정부 예산을 삭감해 다른 곳에 쓰려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칫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때처럼 감염병병원 설치 논의가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메르스 직후 정부는 ‘국가방역체계 개편 방안’을 발표하면서 중앙감염병병원을 짓겠다고 했지만, 그해 국회는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이후 어렵사리 적정성 검토를 통과했지만 아직 설계 착수도 하지 못했다. 정기석 한림대 성심병원 호흡기내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줄어도 다른 신종 감염병이 또 유행하는 건 시간문제”라며 “그제서야 ‘진작 건립할걸’이라며 한탄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인 협의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기현 국립중앙의료원장은 이날 ‘공공 보건의료 강화를 위한 국회 심포지엄’에 참석해 “(이 회장 유족의 기부금을 두고) 온갖 이해 관계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라붙고 기재부는 자기 돈인 양 ‘검증하겠다’고 나서는데 복지부의 정책 의지는 실종된 상태”라며 “하루빨리 감염병병원을 만들겠다던 약속은 어느덧 휴지 조각이 됐다”고 비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이건희 5000억#감염병병원 기부#정부예산 삭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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