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일상의 기록엔 역사책에 없는 ‘삶’이 꿈틀댄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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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생활사에 주목하는 역사학계… “조선인들이 내 자전거 보고 놀라”
美 선교사 알렌이 쓴 글 3869건, 구한말 조선 생활상 엿볼 수 있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속엔 20세기 영국 분위기 고스란히 담겨
한국고전번역원, 개인문집 DB구축… “방송-영화 등 문화콘텐츠로 활용”

구한말 미국인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 그는 1884년부터 20여 년간 조선에 머물며 일기, 공문서 등 3869건에 달하는 문서를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구한말 미국인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 그는 1884년부터 20여 년간 조선에 머물며 일기, 공문서 등 3869건에 달하는 문서를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바퀴 달린 차량이 없는 조선에는 자전거를 탈 만한 도로가 없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동대문으로 갈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구한말 미국인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머문 호러스 알렌(1858∼1932)이 1896년 8월 남긴 개인 원고다. ‘조선에서의 자전거 경험’이라는 이 글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 자전거는 14대밖에 없었고, 도로 곳곳에 배수로가 나 있어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이 같은 알렌의 개인 원고를 포함해 공문, 지도 등 그가 1884년부터 1905년까지 남긴 3869건의 문서를 데이터베이스(DB)화해 10일 공개했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문서들은 구한말 조선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개인들의 미시 생활사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주목받고 있다. 미시 생활사 연구란 개인의 행위와 동기에 집중해 그 속에 반영된 시대사를 탐구하는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최근 고문서 1777종을 모아 ‘한국고전종합 DB’에 수록했는데, 이 중 미시사 자료인 개인문집은 1489종(84%)에 이른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정치와 경제라는 큰 흐름 속에서 개인의 활동을 조명한 게 미시사”라며 “미시사를 통해 역사 현장에서 개인들이 시대 흐름에 따라 어떻게 충돌하고 변화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살았던 영국 데번의 그린웨이 저택. 휴머니스트 제공
영국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살았던 영국 데번의 그린웨이 저택. 휴머니스트 제공
최근 국내 역사학자들이 펴낸 책들에서도 이런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16일 출간된 ‘애거사 크리스티 읽기’(휴머니스트)는 영국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1890∼1976) 추리소설에 담긴 20세기 영국 생활상을 분석한다. 예를 들어 황폐한 저택 엔드하우스를 둘러싼 살인사건을 다룬 ‘엔드하우스의 비극’에서 저택을 상속받은 닉 버클리는 살해 위협에도 “나는 그 집을 사랑해요, 팔고 싶지 않아요”라며 집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여준다. 영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자를 위해 1930년대 중반 매년 35만 채의 주택을 지었다. 부동산 시장 활성화로 크리스티도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런던에만 8채의 집을 소유했다. 영국 현대사를 전공한 저자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은 미시 생활사를 설명할 수 있는 단초들로 가득하다”며 “미시사에서는 일반적인 역사학에서 들을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26일 출간된 ‘사랑에 밑줄 친 한국사’(뿌리와이파리)는 정사(正史)에선 파악할 수 없는 조선시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걸출한 예술가이자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 동안 아내에게 반찬 투정과 어리광을 부리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신간 ‘조선의 살림하는 남자들’(돌베개)은 가부장제를 고수한 조선시대에도 남자들이 집안 살림을 도맡은 이색적인 모습을 담았다. 예컨대 성리학 거학 퇴계 이황(1501∼1570)은 음식, 의복, 농사, 노비관리 등 집안 대소사를 자신이 직접 챙겼다.

미시 생활사는 방송, 영화 등 문화 콘텐츠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은 “문화 콘텐츠 산업 관점에서 한문 고전은 스토리텔링의 원천 소재로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기록 유산은 중요한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역사학계#미시 생활사#미시 생활사 연구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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