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의 과일[이준식의 한시 한 수]<122>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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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에서 돌아보면 비단을 쌓은 듯 수려한 여산,
산꼭대기 화청궁 겹겹이 닫힌 대문들이 차례차례 열린다.
흙먼지 일으키는 단기필마 보며 미소 짓는 양귀비,
아무도 여지(荔枝)가 막 도착했다는 걸 알지 못하네.
(長安回望繡成堆, 山頂千門次第開. 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荔枝來.)


-‘화청궁을 지나며(과화청궁·過華淸宮)’제1수·두목(杜牧·803∼852)



장안회망수성퇴, 산정천문차제개. 일기홍진비자소, 무인지시려지래.

비단을 쌓아 놓은 듯 경관이 빼어난 여산(驪山) 꼭대기에 자리한 화청궁. 매년 겨울에서 봄까지 당 현종은 양비귀(楊貴妃)를 대동하고 장안을 떠나 이 별궁에서 휴양을 즐겼다. 쓰촨(四川) 출신 귀비를 위해 황실은 수천 리 먼 곳에서 여지를 실어 날랐다. 신선도를 유지하려고 황급히 달려온 말이 들이치자 겹겹의 궁문이 차례로 열리고, 고향의 과일이 도착한 걸 감지한 귀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촌각을 다투는 중대사를 전하는 파발마가 아니라 귀비의 환심을 사려는 여지가 막 당도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리라.
근 백년이 흐른 후 시인은 폐허가 된 화청궁을 상상 속에서 되살린다. 현종의 무절제한 일탈이 안사의 난을 초래했고 왕조 쇠망의 단초가 된 회한의 역사다. 3수로 된 연작시 가운데 제1수는 그나마 차분하고 완곡한 분위기다. 하지만 ‘음악이 여산 봉우리마다 울려 퍼지고 양귀비 춤사위에 중원 땅이 무너진다’(제2수)거나, ‘화청궁 박수 속에 안록산이 춤추고 봉우리 너머 웃음소리 바람 타고 넘나든다’(제3수)는 등 시인의 목소리는 점차 거칠어진다. 익는 시기로 보아 여지를 화청궁으로 날랐다는 데 반론이 있지만, 역사적 진실과 무관하게 문학은 귀비의 사치와 향락에 주목했기에 ‘양귀비의 과일’은 늘 비판의 표적이 됐다. 소동파도 ‘궁중 미녀야 여지 먹으며 활짝 웃었을 테지만, 날리는 흙먼지와 뿌려진 선혈은 두고두고 남아있네’란 시구를 남겼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화청궁#양귀비#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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