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김정은 시대의 간첩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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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수·체포영장 2번 기각으로 신병 확보 지연
공안당국, 대공수사 전반 점검하는 계기 돼야

정원수 사회부장
정원수 사회부장
‘조선노동당 자주통일 충북지역당.’

간첩죄로 불리는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 혐의 등으로 2일 구속 수감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고문 박모 씨(57) 등 조직원들이 북측 지령을 받은 뒤 만든 지하 전위조직의 첫 명칭이다. 2017년 7월 북한 대남공작 부서 문화교류국에 승인을 요청했는데 북측은 ‘본사(북한)와 연계 유무를 확인하지 못하도록 하고, 어떤 경우에도 조선노동당이라는 표현을 이용하여서는 안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박 씨 등은 ‘충북동지회’로 바꾸고, 김정은에 대한 혈서맹세문을 써 그해 광복절 북측에 보고했다.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유적지로 선전하는 함북 온성의 산 이름을 따 2001년 3월 결성한 왕재산, 조직 총책이 1989년 김일성 시대의 북한을 방문하고 2002년 1월 만든 일심회는 이름만으로도 북한 연계 조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약 8개월 전 남북 화해 국면에서 만들어진 충북동지회는 명칭부터 다르다. 하지만 북한의 구체적인 지령을 받고, 간첩 임무를 수행하는 구조는 똑같다.

그런데 국가정보원과 경찰 등 공안당국이 작성한 박 씨 등의 구속영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강제 수사가 제때 시작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2019년 11월 20일 중국 선양시의 월마트에서 마약사범이 주로 이용하는 ‘던지기 수법’으로 2만 달러의 공작금을 수령한 것이 대표적이다. 같은 해 10월 12일 북한은 ‘현재 공안당국의 내사 책동이 날로 악랄해지는 조건에서 본사(북한)에서는 무인함을 통한 자금 조달 루트를 새로 개척하려고 한다’며 박 씨 등 표출된 인물 3명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지령을 보냈다. 북한은 남측의 미행으로 인한 작전 실패를 가정해 시나리오별 지침까지 내렸다. 이뿐만 아니라 올 3월 4일 공작금 2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조직원이 유용했다는 대북 보고가 있었고, 북한은 일주일 뒤 동기와 원인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영장대로라면 2019년 10월 북한은 고문 박 씨 등 3명이 남측에 노출됐다는 점을, 올 3월에는 조직 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압수수색영장 집행은 올 5월 27일이었다. 공안당국은 충북동지회 조직원에 대한 체포영장과 주거지 압수수색영장을 동시에 두 차례 신청했는데 법원은 “대면조사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모두 기각했다. 그 뒤 공안당국은 5월 22일 1차 참고인 조사를 했고, 그 다음 날 조직원들은 가방 5개 분량의 짐을 트렁크에 실어 옮겼다. 결국 세 번째 영장 신청 때는 체포영장은 포기하고, 압수영장만 발부받았다. 압수수색 전날 밤 조직원들은 노트북의 중요 파일 30개를 삭제했다. 충북동지회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압수수색을 받은 사실과 해외에서 자신들이 만난 북한 공작원의 이름 등을 먼저 공개했다.

공안당국은 7월 말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신청해 이달 2일 조직원 4명 중 3명을 구속했다. 왕재산 사건 등을 보면 국정원이 해외에서 북측 인사를 접선하는 장면을 채증한 것이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됐다. 충북동지회 사건에서도 국정원이 해외에서 확보한 증거가 영장 발부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2024년부터 간첩 사건 수사가 국정원에서 경찰로 완전히 이관된다. 늦어진 강제수사와 두 차례 영장 기각으로 인한 수사정보 누설 등을 보면 충북동지회 사건은 수사의 성패를 떠나, 적어도 대공 수사의 현재와 미래를 점검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



#북한#김정은 시대#간첩#충북동지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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