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의 두 얼굴…역사 앞에 당당할수 있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3일 15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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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28일, 일본 히로시마(廣島)현 세라(世羅)고 교장 이시카와 도시히로(당시 58세)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앞서 히로시마 교육청은 그에게 졸업식에서 기미가요를 제창하고 일장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교사들은 “기미가요는 군국주의 잔재”라며 반발했다. 교육당국의 지시와 교사 반발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시카와 교장은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BBC, 가디언에 글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로 신간 ‘국가로 듣는 세계사’(틈새책방)를 쓴 알렉스 마셜은 11개국의 국가(國歌)를 통해 각국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이시카와 교장 사건 얼마 후 일본은 기미가요와 일장기를 공식 국가와 국기로 지정한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일본인임을 자랑스러워해야 일본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기미가요는 이 같은 민족주의 강화의 수단이었다.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기미가요를 서정적인 가사를 지닌 노래로만 인식한다. 하지만 우익단체들은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일장기를 흔들며 기미가요를 부른다. 저자는 “기미가요는 아름다운 노래지만 정치에 의해 훼손됐다”고 지적한다.

민족주의 역시 국가처럼 국민을 단합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돼 왔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현실을 부정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신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휴머니스트)를 쓴 임지현 서강대 교수(사학과)는 홀로코스트와 식민지배의 희생자들이 자신도 가해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지구적 연대를 통한 문제해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제목에 나오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가해자와 희생자를 자의적으로 나눠 희생자로서의 도덕적 명분을 확보하려는 행태를 말한다. 예컨대 2000년 유대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는 ‘예드바브네 학살’을 다룬 단행본 ‘이웃들’을 발표했다. 예드바브네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폴란드의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들이 유대인 1600여 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즘의 희생자로만 여겨진 폴란드가 가해자이기도 했던 사실이 밝혀진 것. 폴란드는 나치 강요에 의해 학살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며 희생자 민족으로서의 이미지를 지키려 했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통해 식민지배의 희생자임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함경도 나남에 거주한 일본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에게 당한 성폭력을 에세이 ‘요코 이야기’를 통해 고발했다. 가해자로서의 한국인이 부각된 것. 이 책은 2005년 국내 발간 후 식민통치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부 국내 언론은 요코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가해의 역사를 가리려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전범국인 동시에 원자폭탄 피해국이다. 1945년 8월 원폭의 기억은 일본 사회의 희생자의식을 강화했다. 우파 정치인들은 유대인과 일본인이 백인 인종주의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2차 대전의 책임은 희생자로서의 기억으로 대체됐다. “자기 민족의 희생을 절대화하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 뒤에 줄 세우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희생할 때 기억의 연대를 향한 첫 관문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 지적은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기욱 기자 71w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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