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심과 지현우의 키스[이승재의 무비홀릭]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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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빛나는 순간’의 한 장면. 꽃이 피면 잎이 없고 잎이 자라나면 꽃이 시드는 상사화(相思花)는 찰나라서 더욱 소중한 사랑의 상징이다. 명필름 제공
영화 ‘빛나는 순간’의 한 장면. 꽃이 피면 잎이 없고 잎이 자라나면 꽃이 시드는 상사화(相思花)는 찰나라서 더욱 소중한 사랑의 상징이다. 명필름 제공
[1] 70세 고두심과 37세 지현우가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다니요. 상상조차 쉽지가 않아요. 생각해 보세요. 고두심이 태어나던 1951년은 6·25전쟁 발발 이듬해로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될 시기였어요. 반면 지현우의 생년인 1984년엔 SF영화의 걸작 ‘터미네이터’가 탄생했고, 마이클 잭슨이 펩시콜라 광고를 찍다가 불꽃이 머리에 튀면서 피하지방층까지 손상되는 3도 화상을 입었던 때였다고요(이때부터 피부가 하얘지는 백반증이 본격화되었다). 아마도 이런 선입견 탓에 두 사람이 주연한 영화 ‘빛나는 순간’이 1만5000명 관객에 그쳤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놀라워요. 막상 영화를 보면 둘의 사랑이 그렇게 절절할 수가 없어요. 갱년기가 온 건지 몰라도, 보는 내내 저는 쪽팔리는 수준으로 눈물을 질질 흘렸어요. 30대 다큐멘터리 PD(지현우)가 물속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70대 제주 해녀를 카메라에 담다가 숙명적 사랑에 빠져요. 용암동굴에서 둘은 다소 난도가 높다고 알려진 백허그 키스를 하는데요. ‘이게 아닌데…’ ‘내 생에 이런 행복이 있을 리가…’ 하는 표정으로 처음엔 스스로 당혹해하고 주저하다, 이내 냅다 ‘후루룩’ 하는 처절한 느낌으로 지현우와 입술을 맞추는 고두심의 연기는 그녀의 연기 인생 중 최고로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어요. 칠십 평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곱다”는 이야기를 해준 남자에게 해녀 고진옥(고두심의 극 중 이름)이 난생처음 보낸 러브레터는 귀엽고도 왠지 모르게 운명적이에요. ‘보고 싶다. 고진옥 올림.’

처음 두 사람은 사랑은 턱도 없는 관계였어요. TV 출연을 기피하는 까칠한 해녀와 어떻게든 프로그램 섭외를 성사시켜야 하는 PD였을 뿐이죠. 하지만 물에 들어가 5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고두심을 구한답시고 물에 뛰어들다 익사 직전까지 간 지현우를 구하는 과정에서 고두심은 알게 돼요. 이 청년 안에 놀랍게도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러면서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말해줘요. 호르몬의 폭발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상대의 영혼 속에서 나와 똑같은 생채기를 발견하는 것이 사랑이라고요. 나를 불쌍해하는 아픈 마음으로 상대를 불쌍해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고요. 고두심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는 상사화(相思花)는 그래서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상징물이에요. 꽃이 피면 잎이 떨어지고 잎이 나올 무렵엔 꽃이 없으니, 꽃과 잎이 만나는 아주 빛나지만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이야말로 비극을 운명으로 품은 둘의 사랑이겠지요.

“어떻게 하면 살아질까? 살다 보면 살아진다. 물속에서 숨 참는 것도 참아지고, 살아가는 데 힘든 것도 다 참을 수 있으니까. 살다 보면 살아져.”(고두심)

영화를 보다가 별안간 저는 인생 드라마인 ‘나의 아저씨’가 떠올랐어요. 세상 모든 고통을 짊어진 한 아저씨(이선균)를 사랑하는 소녀(아이유)의 이야기를 담은, 나 같은 아저씨들을 무한 위로하는 이 드라마 속 대사가 찌릿하게 스쳐 지나갔다고요. “너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내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를 끌어안고 우는 거야.”(이선균)

“똑같은 거 아닌가? 우린 둘 다 자기가 불쌍해요.”(아이유)

맞아요. 이선균의 말마따나 “거지 같은 내 인생을 다 알면서도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마운” 마음이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은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쓸쓸한 자기 연민이라고요.

[2] 요즘 뉴스만 보면 ‘이재명과 이낙연 갈등’에 이어 ‘윤석열과 이준석 갈등’으로 칠갑이에요.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난 게 싸움구경이라는데, 제1야당의 61세 유력 대권(예비) 후보와 36세 화제 팡팡 당 대표가 빚어내는 갈등이 얼마나 스릴감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전략적 사랑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이젠 거리 두기가 필요 없을 만큼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아요. 두 사람이 꼭 기억했으면 해요. 둘은 상사화의 꽃과 잎 같은 관계란 사실을요. 누가 꽃이고 누가 잎인지는 모르겠으나, 꽃이 피면 잎은 떨어지고 잎이 나면 꽃은 시들어요. 따스한 햇볕을 둘이 함께 쬘 시간은 어쩌면 고두심과 지현우가 사랑을 나누었던 찰나의 모멘트보다도 짧을지 모른다고요.

정치는 숙명적으로 비극이에요. 백허그까진 못 해줘도, 어차피 헤어질 꽃과 잎이라면 상대에게서 나를 보세요. 잘난 나도 불쌍하고, 잘난 나를 미워하는 못난 쟤도 불쌍하고, 쟤만 못났다고 생각하는 더 못난 나도 불쌍해요. 살다 보면 살아지듯이, 참다 보면 참아진다고요. 아니면 꽃이고 잎이고 나발이고 다 떨어질 테니.

이승재 영화 칼럼니스트·동아이지에듀 상무 sjda@donga.com
#빛나는 순간#사랑의 본질#나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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