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수용]‘논스톱’ 중소기업 퍼주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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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돈으로 中企 부실 덮어두기 급급
보호 대상은 법인이 아니라 사람이다

홍수용 산업2부장
홍수용 산업2부장
‘중소기업이 만든 백신 접종 예약 시스템에 접속하려면 11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대기업이 시스템을 개선하자 접속이 원활해졌다.’

백신 예약 대란 이후 나온 이런 보도에는 대기업 기술력이 중소기업보다 나은데 애초 대기업에 시스템을 맡기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이번 일은 기술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위기 때 문제를 해결할 풀(pool)을 빨리 구성해 대응하는 네트워크의 문제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해 일회용 마스크 8800만 장분 필터를 긴급 공수한 것이 그런 예다.

‘대기업이 더 뛰어난데 현 정부는 왜 대기업을 핍박할까’라고 묻는 건 대기업 편, 중소기업 편을 가를 뿐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다. 백신 접종 예약 시스템을 만든 중소기업은 오류의 해법을 왜 찾지 못했을까, 이 중소기업은 왜 변명이든, 해명이든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이런 질문이 없는 게 이상하다. ‘중소기업은 약자이고 보호 대상’이라는 인식이 엉터리 제도를 만들고 원인 진단을 방해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소기업 의무대출 제도가 그런 예다. 은행 대출이 대기업에 편중됐던 1960년대 중기 대출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만든 이 제도는 원화 대출 증가액의 45% 이상을 중소기업 몫으로 떼어놓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지금 현금 부자인 대기업들은 은행 돈을 빌리려 하지 않는다. 원화 대출이 늘어나는 것은 가계대출이 급증해서다.

명분이 없어진 이 제도를 없애자는 건의가 몇 해 전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에서 나왔다. 당시 한 금통위원은 “중기 의무대출이 한은 소관이라는 것조차 처음 들었다”고 했다. 한은도 제도 폐지에 공감했지만 이 규제는 아직 살아 있다. 이걸 없애면 한은이 중소기업을 소홀하게 대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어 국회의원과 중소기업단체들이 들고일어난다는 것이다. 정부로부터의 독립,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는 한은 최고위층도 중소기업만큼은 손대지 못했다. 그때 이미 중소기업은 성역이었다.

금융당국 고위 관료에게도 중소기업은 성역이다. 이들은 ‘시중은행을 통해 상시 구조조정을 하겠다’ ‘기업 지원과 구조조정을 투 트랙으로 하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구조조정 실패 시 그 책임은 은행에 있고, 지원과 퇴출이라는 선택지를 정치 상황에 따라 골라 쓰겠다는 편리한 말이다. 지난해 말 중소기업 신용위험 평가 결과 부실 징후 기업이 157개로 전년보다 53개나 줄었다고 한다. 기업이 건전해져서가 아니라 은행 돈으로 부실을 덮어둔 건 아닌가. 대선 후보들은 요새 차별화한 정책을 홍보하느라 혈안이 돼 있지만 중소기업 지원만큼은 ‘지정곡’이라 그런지 다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사진 찍으러 현장에 가는 정치인과 보고서에 담긴 현장이 전부인 고위 관료들은 중소기업이 힘든 게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취약 중소기업이 대기업 같은 의사결정 구조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대기업만 한 꿈을 못 꿀 이유가 뭐냐고 한다. 내가 만난 취약 기업 사장들은 미래 비전이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건 남 얘기라고 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목표라면 목표라고 했다. 버티는 게 죄는 아니다. 언제까지나 버티기만 할 수 없는 현실을 알려주지 않고 부실의 성 안에 꼭꼭 넣어두는 게 죄다.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중소기업이라는 법인이 아니라 중소기업에 속한 사람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덮어둔 채 부실이 썩어나도록 방치하는 정치인과 정치 관료, 그들이 중소기업 성역화의 공범이다.

홍수용 산업2부장 legman@donga.com
#중소기업#약자 인식#엉터리 제도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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