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발굴, DMZ 전체로 확대되길[기고/나종남]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대령 입력 2021-08-02 03:00수정 2021-08-0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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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대령
철원평야 북쪽 봉래호에서 발원한 역곡천이 휘감는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는 나지막한 능선으로 연결됐다.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인접한 곳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6·25전쟁 중 최대 격전인 백마고지 전투와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잘 나타났다.

1952년 10월 초 중부전선을 압박하던 중국군의 공격은 백마고지에 집중됐다. 하지만 3배가 넘는 병력을 투입하고도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중국군의 공격은 곧 서쪽 화살머리고지로 향했다. 이곳을 지키던 프랑스 대대가 물러섰다면 국군 제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1953년 6월과 7월에 재개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는 아군이 굳건하게 지킨 백마고지의 역할이 컸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시작된 공산군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적의 공격 방향을 예측한 국군 제2사단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백마고지가 적에게 점령됐다면 화살머리고지 방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전체를 짧은 시간과 좁은 공간에 압축한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전투였다. 최근 연구들은 화력과 기동력을 접목해 중국군을 압도한 국군 제9사단의 작전 수행 능력에 주목한다. 이 전투 직후 미 제9군단은 국군 제9사단의 작전 수행을 “완벽한 전투 준비, 효과적인 정보 활용, 효율적인 전술 구사, 강력한 화력 지원이 원활했던 최고의 전투 사례(a prime example)”라고 분석했다. 이 승리를 통해 국군은 어떠한 적과도 맞서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이 정신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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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19군사합의’에서 논의된 후 지난 2년 반 동안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유해 발굴이 진행됐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시도된 최초의 유해 발굴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힘든 작업을 통해 유해 총 3000여 점(잠정 424구)과 유품 10만여 점을 발굴했고 국군 전사자 유해 중 9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곧 유해 발굴이 시작될 백마고지에서 국군은 500여 명이 전사한 것을 포함해 총 3000여 명, 중국군은 1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투 중 유해 상당수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을 텐데 이번 기회에 기억과 기록에 묻힌 전투의 진실과 더불어 수많은 유해와 유품 발굴을 기대한다.

최근 일부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해 발굴 방식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유해 국적 판정은 단순히 유품 하나로만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오해가 없도록 군 차원에서 더욱 엄정하게 발굴을 진행해야 한다.

남북 공동 유해 발굴은 분단과 전쟁 발발의 아픔을 이겨내고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화살머리고지에서 첫발을 내디딘 DMZ 유해 발굴이 백마고지를 거쳐 DMZ 전체로 확대되길 바란다. 더 나아가 공동 유해 발굴이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되길 기원한다.

나종남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대령
#dmz#화살머리고지#유해 발굴#dmz 전체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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