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오페라단 맡는 김은선 “동양인-여성 편견…예술은 나와 싸우는 일”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28일 15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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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SFO)가 한국인 지휘자 김은선(40)을 차기 음악감독으로 발표했다. 이는 1989년 정명훈의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취임 이후 한국 지휘자 최고의 성과로 받아들여졌다. 올해 8월 1일 SFO에 공식 취임하는 그를 최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가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겨울에 빈 국립오페라, 내년 독일 베를린 도이체 심포니, 영국 필하모니아, 미국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디트로이트 교향악단…” 등의 일정을 얘기하며 “모두 데뷔 연주”라는 말을 덧붙였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 극장과 오케스트라들이다. “커리어가 폭발하듯 치솟는 시점 아니냐”고 하자 전화기 너머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SFO 차기 감독으로 임명된 뒤 1년 반이 흘렀습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이 전 세계를 휩쓴 1년 반이었죠. 제한된 여건 속에서 SFO와 어떻게 일해 오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지휘자들은 객원 연주가 많기 때문에 회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죠. 지난해 지휘 일정에 많이 취소돼 거의 모든 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예전 SFO에서 작품을 지휘하셨을 때의 인상은 어땠습니까.

“2019년 5월에 드보르자크 ‘루살카’를 지휘했었죠. 세계 수십 개 오페라극장과 악단을 지휘했지만 SFO에서 지휘봉을 들었을 때 너무 ‘케미’가 딱 맞는 걸 느꼈어요. 한번 만나보고 바로 친해진 느낌이었죠. 행정 파트도 너무나 친절하고 언제든 도와줄 자세가 되어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여러 활동을 해오셨는데, SFO를 유럽 오페라 극장과 비교하자면 어떤가요.

“미국 오페라극장들은 유럽보다 보수적인 편입니다. 무대나 의상, 연출 콘셉트 등에서 혁신적인 시도가 적죠. 음악감독이 운영 전반에 관여하는 지는 극장마다 다른데, 저는 대체로 여러 의견을 내놓으려 합니다. 미국과 유럽이 크게 다른 점은, 유럽에서 국가의 지원이 큰 데 반해 미국에서는 민간의 예술지원이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술계에 기부하시는 후원회 분들을 만나볼수록 그분들의 예술사랑에 감명을 느꼈어요. 유럽에서만 활동했다면 느끼기 힘들었을 부분이죠. 이 분들이 연주가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을 대답하면서 연주가와 팬들의 ‘소통’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해와 올해는 예술계에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지휘자로서, 개인으로서 어떻게 지냈는지요.

“미국으로 활동의 거점을 거의 옮긴 시점에서 코로나19가 터졌어요. 너무 많이 연주가 취소됐죠. 거의 모든 연주가들이 겪은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준비를 다 하고 막판까지 무대를 가지려고 노력하다 거의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거든요. 저도 악보를 늘 손에서 놓을 수 없었어요.”

―그래도 큰 무대들이 있었습니다. 지난해 프랑스 독립기념일 콘서트를 에펠탑 앞의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지휘하셨죠.

“3년 전 이미 예정되었던 콘서트지만 3월에 파리가 이동금지에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불투명해졌어요. 공연이 가능할지, 장소가 바뀔지, 악단 편성을 줄일지, 외국 연주자들이 참여할 수 있을지 등등. 결국 연주자는 많이 바뀌었고 무관중으로 진행되었죠. 그런데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도 이동금지 이후 이 연주가 처음이었어요. 첫날 연습할 때부터 단원들도 모두 기뻐했죠.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청자가 보아주셨고, 바로 프랑스 국립오페라 다음 연주 일정도 잡혔어요.”

―그 외 공연들도 소개해주시면.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족들을 위한 콘서트 세 개를 했어요. 모두 무관중으로 치러졌죠. 저로서는 라 스칼라 데뷔였고, 매우 재미있었죠. 여러 공연들이 취소됐지만 마드리드 등에서도 공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지휘자는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들이 ‘잘 안 굴러가는 고급차’ 같다고 하던데요. 품격은 높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저에게는 ‘잘 굴러가는 고급차’였어요.” (웃음)

―음악감독을 맡으시면서 시작되는 2021~2022 시즌에 SFO에서 어떤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시게 되는지요.

“제가 지휘하는 작품으로는 8월 21일 개막하는 푸치니 ‘토스카’와 10월 개막하는 베토벤 ‘피델리오’가 있습니다. 이외 객원지휘자들이 맡는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돈 조반니’, 2016년 SFO가 초연한 현대 오페라 ‘붉은 방의 꿈’ 등도 있죠. 유감스럽게도 코로나19로 프로덕션 수는 많이 줄어들어든 상태지만 기대와 설렘을 갖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9월 10일 열리는 ‘오러클 파크 콘서트’도 흥미로운데요. 야구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구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외 콘서트겠군요.

“야외 콘서트는 아니고, 극장에서 하는 콘서트를 야구장에 중계합니다. 시민들에게 친숙한 공간이자 콘서트여서 제게도 흥미롭습니다.”

―지금 전화를 휴스턴에서 받고 있는데, 언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시나요.

“그동안 휴스턴 오페라 수석객원지휘자를 맡아왔어요. 7월 초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할 예정입니다.”

―고국 무대에서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가야죠. 유럽처럼 가까우면 잠깐씩 다녀올 수 있을 텐데.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웃음)

―201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취임한 키릴 페트렌코와 함께 일하신 적이 있는 걸로 들었습니다. 어떤 분이었나요.

“2011년 그가 프랑스 리용 오페라 음악감독일 당시 보조지휘자로 활동했죠. 페트렌코는 악보를 절대 손에서 놓는 법이 없고 늘 연구하는 분이었어요. 연습 때 제가 들은 바를 묻고, 사소한 코멘트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골똘히 생각합니다. 때로는 한밤중에 ‘내일 아침 연습 전에 악보에 이런 지시사항을 적어놓으라’고 문자를 보내기도 했죠. 음악이 전부인 분입니다.”

―여성 지휘자가 많이 늘어났지만 지휘는 ‘남성의 일’이라고 인식되어 온 면이 강합니다. 동양인으로서 서양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을 거구요. 지휘계에서 커리어를 키워오면서 어려운 일은 무엇이었는지요.

“예술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이죠. 지휘는 남자든 여자든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여자로 자라왔기 때문에 남자가 어떻게 하는지는 알 수 없죠.(웃음) 각자 분야의 정상들과 일하는 직업이고, 이 최고들과 일하다 보면 음악에 대해 생각할 시간 밖에 없어요. 동양인으로서 마주치는 편견도, 우리가 서양인이 판소리를 하는 걸 보면서 선입견을 갖기 쉬운 것처럼 역시나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쨌든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지휘자로서 성장하면서 가족, 스승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와 ‘선한 영향력’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어릴 때부터 뭐든지 믿고 맡겨 주시는 편이셨어요. 제가 중학생 때 아버지(김성재 전 문화부장관)가 써주신 글이 있어요. ‘생명을 존중해라. 예술의 즐거움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세계를 바르게 아는 기쁨으로 배움의 길을 가라. 정직한 노력의 결실로 감사하면서 살아라.’ 그 글을 서예가이신 외할아버지께서 써주셔서 제 방에 걸어두었죠. 매일 보면서 제 좌우명으로 삼게 된 것 같아요.

연세대 작곡과에 진학한 뒤 지휘자의 꿈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지휘를 가르치신 최승한 교수님이 ‘너는 좋은 지휘자가 될 수 있을거야’라고 말씀해주셨죠. 지휘자가 가져야 할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실제로 도움 되는 말씀을 들려주셨어요. ‘같은 곡을 몇 백 번씩 해본 악단들 앞에서 어떻게 네게 원하는 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난 뒤 사람들이 하는 칭찬을 다 믿지 마라. 그 공연이 싫었던 사람은 이미 가버렸다’는 등의 말씀들이죠. 지금도 늘 마음에 새깁니다.”

―여러 무대에 오르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면.

“2019년 가을에 신시내티 심포니를 지휘하면서 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와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협연했어요. 그런데 첫 악장부터 기분이 이상했어요. 무터가 어디엔가 신경을 빼앗긴 느낌이었어요. 2악장이 시작되고 얼마 뒤 연주를 중단하더니 무대 바로 앞의 한 관객에게 ‘휴대전화 끄세요’라고 얘기하더군요. 관객이 연주 동영상을 찍고 있었던 거예요. 작은 에피소드지만 새로운 세대의 관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늘 스마트폰에 빠져 있고 세상과 접속되어 있으며 새로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이 시대의 관객들과 어떤 방식으로 클래식과 만나는 것이 좋을까…. SFO에서도 이런 생각을 경영진과 많이 나누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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