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10억 쾌척해 기념비적 고대유물 발굴 도운 사연

  • 신동아
  • 입력 2021년 6월 9일 11시 29분


코멘트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한국작가들의 전시가 이뤄질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은 2020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화가 이우환전. [뉴시스]
이건희 회장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한국작가들의 전시가 이뤄질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진은 2020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화가 이우환전. [뉴시스]
가난했던 시절, 한국은 문화재 도굴이 횡행했다. 앞서 소개한 호암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책(‘하고 싶은 이야기’?1993년)에는 호암이 도굴꾼들로부터 문화재를 사서 원 주인인 사찰에 돌려주었다는 사연이 소개됐다.

도굴된 문화재 주인에게 돌려준 호암

“지금이야 그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도굴범들이 판을 치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도굴범들의 폐해에 대해서 퍽 안타까워했다. 도굴행위도 물론 불법이지만 그들이 도굴한 물건들이 상당수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 더 마음 아파했다. 1960년대 중반 무렵인 걸로 기억하고 있다. 누가 대구 동화사 석탑에서 도굴한 국보급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아버지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걸 사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주었다. 당시 돈으로 15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저 물건은 내가 사지 않으면 결국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게 한숨 섞인 아버지의 말이었다.

그로부터 약 6~7년이 흐른 뒤 아버지는 동화사 주지 스님을 초청해 만나신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 국보를 돌려주었다. ‘이 귀한 것이 어떻게 흘러 다니다가 결국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알아보니 동화사 물건인 것 같으니 주지스님께서 가져가셔서 잘 보관하십시오’. 그 장면을 나도 곁에서 보고 있었기에 당시 그 국보를 돌려받은 주지스님이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거금을 주고 산, 게다가 이력도 숨겨진 문화재를 원주인을 찾아 돌려준다는 것은 보통 사람 같으면 하지 못할 일이다. 호암이라고 아깝고 서운한 마음이 없었을까. 문화재에 대한 아버지의 애착과 관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맹희 전 회장은 글 말미에서 그런 아버지의 심정을 이렇게 헤아리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물건을 산 뒤 바로 돌려주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걸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미술관에 두고 오랫동안 볼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외람된 생각까지 든다. (아버지가) 명품을 아끼는 마음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이다.”

뭔가를 오래 수집해본 사람들은 안다. 거기에는 취향, 관심을 넘어 물건 하나하나를 손에 쥐기까지 들인 정성, 다시 말해 영혼이 배어있다는 것. ‘이건희 컬렉션’을 받아드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도굴 문화재 이야기가 나온 김에 생전에 이건희 회장이 한국 고고학계의 위대한 발굴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지‘를 도굴꾼들로부터 지켜낸 일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고고학계 100년 내 최대 발굴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유적지. 한국 고고학계 ‘100년 내 최대 사건’이라 평가받는 다호리 유적지 발굴은 이건희 회장의 지원이 마중물이 됐다. [문화재청 제공]
경남 창원 다호리 고분군유적지. 한국 고고학계 ‘100년 내 최대 사건’이라 평가받는 다호리 유적지 발굴은 이건희 회장의 지원이 마중물이 됐다. [문화재청 제공]
2012년 5월 1일자 ’동아일보‘는 문화재위원회 발족 50주년을 축하하는 고고학계 원로들의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기사에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다음과 같은 짧은 회고를 싣고 있다.

“다호리 유적지가 발견되기 전, 이곳에서 몰래 파낸 유물을 누군가가 팔려고 했을 때 이건희 삼성 회장이 조건 없이 도와줘 구매할 수 있었다. 이들을 역추적해 한국 고고학계의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는 다호리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다.”

지금 사람들의 기억에는 희미한 ‘다호리 유적 발굴’은 1980년대 말 한국사회를 넘어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사건이었다. 다호리는 경남 창원시 동읍에 소재한 곳으로, 이곳 232번지 일대에는 기원 직전인 BC 1세기부터 기원 직후인 AD 1세기경 조성된 고대 무덤군(群)이 대거 조성됐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도굴꾼들 실습장’이라 불릴 정도로 도굴 피해를 극심히 보다가 1988년 1월에서야 정부 차원에서 현장 발굴 1차 조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 유적지 발굴에 이건희 회장이 어떤 기여를 했다는 것일까. 정양모 전 관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사연은 이랬다.

“제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미술품 두세 점을 가져왔는데 딱 보기에도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해보였습니다. ‘어디서 났느냐’ 물으니 ‘누가 도굴을 했다’는 거예요. '장소를 알려주지 않으면 당장 고발하겠다’고 했더니 10억 원에 물건을 사면 알려주겠다는 거 아닙니까. 내 눈엔 적어도 20억 원의 값어치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는 당장 관장(한병삼)에게 달려가 “어떻게든 우리가 사줘야 도굴 장소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장관에게까지도 보고했지만 그런 거금을 당장 동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기야 정부에서 그 큰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난감했지요. 고민 끝에 이건희 회장님을 찾아 가자는 생각이 들었고 비서실을 통해 연락을 드렸더니 날짜를 잡아 주셨습니다. 한 관장과 함께 찾아갔지요. 회장님은 ‘두 분이 함께 오신 걸 보니 중요한 일인 거 같다’며 흔쾌히 시간을 내 주셨고 저희들의 설명을 죽 들으시더니 바로 소병해 비서실장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두 분이 원하는 걸 해드리라’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뜻 10억 원을 내 주신 거지요.”

그렇게 해서 정 전관장이 알아낸 장소가 바로 경남 창원 다호리였다. 한국 고고학계 100년의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받는 고대 유물 발굴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원전 1세기부터 문자가 쓰인 한반도
정 전 관장은 유적지에 처음 갔을 때의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진흙으로 덮인 곳을 파 내려 들어가니 도굴꾼들이 빠트리고 간 것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한 3m 더 파 내려갔을까요, 통나무로 된 목관이 나오는 겁니다. 도굴꾼들이 이미 도끼로 뚜껑의 반을 잘라 없애 버렸고 안에 건 다 수습을 해간 뒤였습니다.

목관을 들어 올렸더니 바닥에 뭐가 붙어 있었는데 대나무 상자였습니다. 중국에서 ‘요갱(腰坑)’이라고 불리는, 무덤과 함께 묻는 부장품 상자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요갱이 보물상자였습니다. 청동기, 철기, 청동검 등 국보급 유물이 가득했으니까요. 한마디로 엄청난 거였습니다.”

당시 발굴 실무팀으로 현장에 파견돼 일했던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당시 학예연구관)의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이다(2016년 3월16일자 ‘동아일보’).

‘1988년 1월에 처음 가 본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고분을 파헤친 도굴 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20여일 뒤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착수했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직감은 곧 ‘월척’으로 이어졌다. 도굴꾼들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m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m, 길이 2.4m의 통나무 목관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도굴꾼들이 목관 내 유물을 빼내기 위해 상판 일부를 깨뜨려 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목관을 빨리 수습하기 위해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목관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 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동경(銅鏡) 조각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이었다. 안에는 △철검, 꺾창, 쇠도끼, 낫 등 철기 △칼집, 활, 화살, 두(豆), 부채, 붓 등 칠기(漆器) △동검, 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원 삼국시대 변한의 목관과 칠기였다.“

다호리 유적은 2000년 넘게 땅 속에 묻혀있었던 귀한 보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와 한반도에 화려한 고대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했다. 특히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씨를 깎아내는 지우개)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로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켰다.

중국 한나라 때 화폐인 오수전(五銖錢·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는 원형 동전. 한나라 무제가 다스리던 기원전 118년에 만들어져 당나라 때인 621년 폐지됐다)도 나왔다. 이는 무덤의 주인공들이 기원전 1세기부터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倭)와 교역을 벌여 부를 쌓은 지역 내 수장들일지 모른다는 추정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정양모 전 관장의 말이다.

“이건희 회장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놓은 10억 원이 아니었다면 발굴은 불가능했습니다. 고인이 참으로 대단하셨던 게 나중에 떠들썩하게 발굴이 이뤄졌는데도 단 한 번도 우리한테 혹은 공개적으로 당신이 도와줘 발굴이 이뤄졌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물건을 보고 싶다거나 하는 말씀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정말 대인(大人)이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독재자 돈은 안 받아도 이회장 돈은 받는다
이건희 회장의 출연금과 정부지원금을 합쳐 개관한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 한국관. [동아DB]
이건희 회장의 출연금과 정부지원금을 합쳐 개관한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 한국관. [동아DB]
이번 취재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이 보이지 않게 한국 미술계를 지원한 사례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한국 미술 세계화를 위해 세계 주요 미술관의 한국관 개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한 미술계 원로의 말이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국관을 만들려고 할 때가 전두환 정권 때였습니다. 정부에서 몇 십만 달러를 기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미술관 측에서 ‘독재자 돈 안 받는다’며 돌려주는 바람에 개관이 늦어지고 있었지요. 소식을 들은 이 회장이 출연을 하겠다고 하니까 ‘삼성 돈이라면 받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세계 미술시장에서 이 회장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기업인으로 존경받는 콜렉터였고 ‘삼성’의 브랜드도 대단해져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측은 이미 받았던 정부 출연금을 합쳐서 ‘한국관’을 만들었습니다. 일본관, 중국관에 비하면 매우 작은 규모였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중국만 해도 세계 미술의 중심부에 전시관이 많다 보니 회화사, 도자사 등 연구자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대학에 전공과정도 개설되고요. 하지만 우리는 워낙 보여줄 물건도 적고 공간 자체가 없으니까 관심은 물론 연구자도 안 나오고 대학에 과목 개설도 잘 안 되는 거거든요. 전 세계 관람객들이 모이고 인재가 모이는 미국 뉴욕 중심부에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에 한국관이 생긴 것은 전 세계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물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시 한국관 개관을 주도한 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뿐 아니라 세계 유수 미술관 한국관 개관은 거의 이 회장과 홍라희 관장의 지원 덕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말이다.

“삼성이 나서서 홍보한 적이 없다보니 잘 모르는 국민들이 많습니다만, 샌프란시스코 아시안(Asian) 아트 뮤지엄, 하와이 호놀룰루 뮤지엄,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 빅토리아 뮤지엄, 프랑스 국립 기메(Guimet) 동양 미술관의 한국관 개관은 이 회장님 부부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백남준 이우환 등 한국이 낳은 거장들의 국제화에도 이건희 회장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다시 김 전 관장 말이다.

“세계적인 미술관인 미국 뉴욕 구겐하임에 꽤 큰 규모의 이건희 펀드가 있었습니다. 구겐하임이나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같은 세계적인 현대 미술관에 한국 작가들을 어떻게든 알리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알린다는 게 다 돈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백남준 전시도 그 펀드에서 했고 이우환 선생 전시도 그 펀드에서 했습니다. 청자나 백자를 만든 무명의 도공들,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장님 부부는 결국 작가를 키워내야 진정한 문화적인 축적이 이루어진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고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최순우 옛집’을 지킨 사연
김 전 관장은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일화를 전했다. 다름 아닌 ‘최순우 옛집’으로 불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사가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 생가를 지킨 일에도 이건희 회장 부부가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이 집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유명한 최순우 선생이 1976년부터 1984년 작고할 때까지 살던 집으로, 등록문화재 제268호이기도 하다. 시민들의 성금으로 매입해 보전한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제1호이며 2004년에 개관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이 회장 부부의 마중물이 있었다. 김 전 관장 말이다.

“일대에 재개발 붐이 일면서 최 선생 따님이 막 계약을 마친 상태라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깜짝 놀라 나섰습니다. 따님이 팔려고 내놓은 걸 안 된다고 설득을 했더니 이미 계약금을 받은 상태라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궁리 끝에 홍라희 관장님한테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맘대로는 못하고 회장님께 의논해 볼게요’ 하시더군요. 바로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이 회장이 단 1초도 머뭇거림 없이 ‘지원하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이 고미술품 수집을 하면서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사람이 최순우 관장이다, 그분의 생가를 지키는 일이니 도와야한다고 하셨다는 겁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도 십시일반 동참했지만 최 선생 생가를 지킨 일은 이렇게 회장님 부부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최 선생과 어떤 인연이 있었을까. 이는 선대 회장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말이다.

“호암은 원래 일본 고야마 후지오(小山 富士夫, 1900~1975)라는 세계적인 감정가이자 고전 미술사학자와 친했는데, 어느 날 고야마 선생으로부터 ‘한국에도 대단한 감정가가 있다’면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의 존재를 알려줬습니다. 그때부터 호암은 최 선생과 인연을 맺고 가깝게 지냈지요. 197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 수집 한국미술특별전’을 했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호암 유물이 어떻다는 게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아, 호암 선생이 이런 걸 모았구나’ 하는 걸 알게 해준 전시였지요. 이 전시가 바로 최 선생 제안으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최 선생은 호암에게 ‘훌륭한 걸 많이 모으셨는데 한 번 세상에 알리는 게 좋지 않겠는가’ 제안했고, 호암이 쾌히 승낙해 열게 된 거지요. 제가 최 선생 바로 밑에서 일했으니까 너무 잘 아는 내용이지요.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호암이 고야마 선생을 만날 때 대부분 곁에 있었고 일본에 갈 때도 동행해 훈련도 많이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최순우 선생과도 인연이 깊었고요.”

도자기는 감정가 수준까지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좋은 컬렉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말한다(‘중앙일보’ 4월 29일자).

우선 문화재와 미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냥 관심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지대한 관심이어야 한다는 것, 둘째 좋은 작품과 중요한 문화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 셋째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지막 넷째가 재정적 능력, 즉 돈이다.

안 교수 기준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수집가였다. 특히 필자가 취재 과정에서 주목하게 된 건 회장의 미술품을 보는 안목이었다. 이것은 선대회장 때부터 습득한 천성적인 것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치열한 공부의 산물이라고 증언하는 이들이 많다. 우선 이종선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이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 회장은 한번 몰입하면 중간에 멈출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바로 그런 면이 도자기 수집에 있어서도 빛을 발했다. 조선 초기 청화 백자에 대해서도 전문가 뺨치는 지식과 감정실력을 가졌다. 복제품을 여럿 만들어 청화 안료의 푸른색을 비교하며 받은 인상을 정리했을 정도였다.”

이 회장은 개인 교습까지 받아가며 도자기 공부에 몰두했다고 한다. 다시 이 전 부관장 말이다.

“그는 한번 문제를 잡으면 그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알기 전까지는 끝내지 않았다. 백자를 좀 더 잘 알기위해 수집가 홍기대 같은 이에게 백자 수업을 많이 들었다. 이 회장은 사회적 지명도에 관계없이 자신이 알고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해서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자주 출입하는 골동품상들에게도 시중의 사정과 골동품 지식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골동상 K씨도 선생 자격으로 출입이 잦았다.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도자기를 알려면 도자기의 생산 전반에 대해 알아야 한다. 특히 태토(胎土·도자기 밑감이 되는 흙)나 유약을 감별하는 일은 감정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이 회장은 한번 빠지면 끝을 보는 성미라서 그런지 나중에는 백자 ’감정‘까지 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이는 김재열 전 부관장 말과도 일치한다.

“작품의 구입이라든지 평가라든지 이런 걸 놓고 정말 드물지만 독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회장의 안목과 지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대 그룹을 끌고 가는 기업인이 어떻게 저렇게 미술품에까지 전문가적인 안목과 지식수준을 갖고 있을 수가 있는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회장님은 한마디로 굉장히 학구적이었습니다. 단순하게 기호나 취미로 컬렉션을 하는 게 아니고 작품 한 점 한 점이 어떤 학술적인 가치를 갖고 있고 미술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왜 중요한지, 더 나아가 우리 국민들이 왜 알아야 되는지 까지 생각했습니다. 또 아무리 개인적으로 끌리는 작품이라고 해도 반드시 전문가들한테 확인을 받았습니다. 진품이 확실한지를 묻는 것은 기본이요, 어떤 점이 작품의 장점이고 단점인지 분명하게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구입을 결정했습니다. 곁에서 뵌 회장님은 소위 말하는 ‘심미안’ '감식안'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높은 경지에 있었습니다. 미술품을 보는 높은 안목은 감성에 대한 아주 철저한 훈련을 받고 연마를 해야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물건 좋으니까 사시오’라는 말만 듣고 구매하는 식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지요. 서화(書畵)에 대해서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계셨는데 일반적으로 서화 콜렉션을 하는 분들은 콜렉터 중에서도 수준이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소장자들도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잘 내놓지 않아 좋은 작품들은 유통자체가 잘 안 되는 편인데 회장님은 좋은 서화를 구하기 위해 평소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작품이 나오면 꼭 구입하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면 사람의 성격이 순화가 되고 정신세계가 높아지게 되어 있다면서 격이 높은 작품을 찾았습니다. 이는 곧 제품과 디자인 개발로도 연결되어 삼성의 ‘명품’ 시리즈가 나온 배경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일반 다른 콜렉터들과의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이러다보니 작품 한 점 한 점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었다고 한다.

다시 김 전 부관장 말이다.

“고려시대 청동 향로인 ‘청동은입사 포류수 금문 향완(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香?·보물 제778호)’이란 게 있는데 이걸 리움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일입니다. 회장께서 작품을 보시더니 ‘내가 저걸 살 때 뒤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고 하시는 거예요. 보통 전시를 할 때는 정면만 보여주기 때문에 저희들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나중에 확인해보니 정말 뒤에 보일락 말락 작은 구멍이 있는 게 아닙니까. 구입한지 20~30년도 넘었던 작품이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계셨던 거죠. 그런 모습을 뵐 때면 정말 숙연해진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작품 하나하나를 저 정도로 사랑하고 애착을 갖고 계시니 더 조심해서 소중하게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요.”

이번에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말이다.

“이건희 회장이 부회장이던 시기와 취임 초기에 몇 번 독대한 적이 있는데 고미술 전반에 관한 질문이 전문가들 이상이었습니다. 특히 도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깨진 것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고수는 전반적으로 그 문화재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살피는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흠 없이 깨끗한 명품만 좋아한다면 고수라고 할 수 없는데 이 회장은 진정한 고수의 경지까지 간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번은 집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는데 거실 가운데 커다란 둥근 테이블 위에 도자기들을 올려놓고는 ‘오늘은 하나하나 공부를 해야 겠습니다’면서 한 작품 한 작품을 꼼꼼히 살피며 장단점을 물었습니다. 어떤 날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분청 편병(扁甁·납작하고 둥근 몸통에 짧은 목이 달려있는 자라 모양의 병으로 여행을 하거나 들에 나갈 때 물이나 술을 담는데 쓰였다)을 놓고 ‘이게 왜 좋은 거냐’ ‘청자 같은데 왜 분청이냐’ 등등 집중적인 질문을 받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가 물었다.

-가격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셨나요.

“작품의 가치나 진위만 얘길 했지 값이 얼마냐 하는 건 한번도 질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이 기사는 신동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