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돈 벌러 일본 갔다가 불귀의 객이 된 동포 노동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8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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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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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네(箱根)산을 알고 계시나요? 일본 가나가와현에 있는 해발 1438m의 화산입니다. 그 일대는 하코네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유명 관광지죠. 산 중턱에 있는 온천마을에는 일본의 최고급 온천 료칸이 있고 노천 온천수로 바로 삶아내는 계란은 별미라고 합니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면 45분 만에 산자락의 오다와라역에 도착하고 여기서부터 등산열차와 케이블카가 연결돼 노약자들도 힘들이지 않고 올라가 주변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하코네산 등산열차는 처음에는 말이 끌다가 1900년부터 전철이 됐습니다. 종점인 고라(强羅)역까지 연장공사를 시작한 해가 1915년이었다고 합니다. 경사가 가팔라 연장구간에는 3곳에 스위치백 선로를 설치했고요. 열차가 지그재그 식으로 갔다 왔다 하며 올라가는 방식입니다. 4년 만인 1919년에 힘겹게 공사를 마치고 개통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재난이 닥칩니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간토(關東)대지진입니다. 열차가 뒤집어지고 선로는 파묻히거나 엿가락처럼 휘어졌습니다. 오다와라 역사 등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죠. 당시 ‘재기 불능’이라는 절망감이 감돌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1924년부터 복구공사를 시작해 그해 말에는 등산열차가, 이듬해 3월에는 케이블카가 다시 운행했습니다. 돌관공사의 결과라고 하죠. 그런데 1925년 2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여기서 일하던 동포 노동자들의 단발성 기사가 실렸습니다.

하코네산 전철공사가 끝난 뒤 동포 노동자 100여명이 갈 곳이 없어 온천마을 등지를 떠돌며 울고 있다고 했습니다. 남아있자니 굶주림과 추위를 견딜 수 없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여비가 없다고 했죠. 10여명은 병을 앓고 있고 벌써 한 명은 숨졌으나 시신을 처리할 방법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픈 이들이 날마다 늘어간다고 했으니까 숨진 노동자들이 더 생겼을 겁니다. 어떻게 이런 참사가 일어나게 됐을까요?

한마디로 일제치하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빚어진 일이었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경작권을 잃고 고향을 등져야 했다고 여러 번 지적했습니다. 당시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없어서 노동자로 살 수도 없었죠. 남부지방에서는 일본행이 생계를 잇는 대안이 됐습니다. 일본에는 막노동 일자리가 있었거든요. 요즘의 외국인노동자들인 셈이었죠.

하지만 간토대지진이 동포 노동자들까지 덮쳤습니다. ‘조선인 폭동설’ ‘우물 독약 투입설’ 같은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6000명이 넘는 동포들이 학살당했죠. 살기 위해 건너간 일본에서 목숨을 위협받자 서둘러 돌아옵니다. 이런 귀환자들만 6만 명이 넘었답니다. 그러나 고향에 가봤자 먹고 살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죠. 1924년에는 심한 가뭄까지 일어났거든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이들은 다시 일본행에 나섰습니다.

일제가 조선인의 일본행을 막는 바람에 출발지인 부산에는 4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사회문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이틈을 타 상애회니 부산노동공제회니 하는 단체들은 여행증명서 브로커 노릇을 하면서 뇌물을 챙기고 있었죠. 보다 못한 민족주의단체 부산청년회가 1924년 5월 부산시민대회를 열어 일본행 방안을 빨리 마련하라고 일제 당국에 촉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코네산 등산열차 공사장에서 일하던 동포들도 이렇게 간신히 건너왔겠죠. 이들이 공사가 끝났는데도 돈이 없게 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저임금은 분명했겠지만 그나마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아껴 쓰지 않았는지 섣불리 추측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역만리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데 도와줄 손길조차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같은 지면에 기근으로 굶주리는 농민을 위해 쓰라며 해외에서 성금을 보내온 기사와 대비돼 더욱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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