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엄마의 부엌 연금술

신동아 입력 2021-05-22 18:29수정 2021-05-2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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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맛 이야기’]
구수한 멸치 국물에 할랑하게 말아 내는 ‘엄마표 잔치국수’는 우리 외삼촌들에게 추억의 음식이다. GettyImage
며칠 전 엄마 생신이라 정말 오랜만에 가족이 모였다. 세월은 나만 관통해 나이도 나만 먹는 것 같았는데 엄마가 어느새 일흔아홉 번째 생일에 도착했다. 하나뿐인 조카는 나보다 키가 훌쩍 더 커서 나타났다. 엄마를 모시고 재빨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가려고 집에 들어섰는데 어쩐지 어수선하다. 웬일인가 물으니 근처에 계신 외삼촌이 다녀가셨단다. 엄마는 삼촌에게 땅두릅 넣은 봄 향 가득 부침개 한 장 부쳐주느라 나갈 채비도 못 한 채였다. 엄마는 주섬주섬 옷을 챙기는 중에도 “멸치국수 한 그릇 삶아 먹여 보냈어야 하는데 어쩌냐”라고만 하신다.

달무리만하게 놓이던 어머니의 흰 땅



뻔한 푸성귀를 ‘지지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는’ 일도 엄마가 하면 ‘연금술’이 된다. 김도균


아흔 문턱을 채 넘지 못하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외삼촌은 별로 울지 않았다. 엄마가 장례를 마치고 “너는 왜 실컷 울지도 않느냐”고 물으니 “나한테는 엄마 같은 누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엄마는 그때부터 손위 오빠 둘, 손아래 남동생 넷의 엄마가 됐다. 김종해 시인은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재래시장 곳곳을 뒤진다”고 했는데, 우리 외삼촌들은 운이 좋게도 종종 모여 구수한 멸치 국물에 할랑하게 말아 내는 엄마표 잔치국수를 드신다. 간혹 ‘인증샷’을 찍어 내게도 보내주신다. 그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덩달아 푸짐한 국수처럼 잔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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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여름날 저녁 칼국수 반죽을 밀었다/ 둥글게 둥글게 어둠을 밀어내면/ 달무리만하게 놓이던 어머니의 부드러운 흰 땅,/ 나는 거기 살평상에 누워 별 돋는 거 보았는데 (중략) 솥 열면 자욱한 김 마당에 깔려...... 아 구름 구름밭,/ 부연 기와 추녀 끝 삐죽히 날아 오른다 _문인수 詩‘ 칼국수’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 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지지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후략) _이문재 詩 ‘연금술’

엄마가 부엌에서 피워내던 밥 냄새

지금도 엄마 집에 가면 엄마 품에 안겨 철부지처럼 웃고 떠든다. 그런 자식 모습을 보는 게 엄마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GettyImage




어릴 적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면 재깍 뛰어와 식탁에 앉은 적이 거의 없다. 하던 거 마저 하고, 보던 거 마저 보는 게 먼저였다. 그럼에도 엄마가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굽는 소리와 냄새가 집 안에 차오르는 시간은 무척이나 좋았다.

흔하디흔한 밀가루 반죽이라도 엄마가 칼국수를 밀면 ‘부드러운 흰 땅’이 되고, 멸치를 달달 볶는 일도 ‘연금술’이 돼 입에는 맛이 되고, 마음에는 안정과 행복이 됐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엄마가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를 마냥 피워내는 게 철없이 좋기만 했다.

땅거미가 져서야 들어온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뛰노느라 하루를 다 보내고/ 종일 일한 애비보다 더 밥을 맛나게 먹는다/ 오늘 하루가, 저 반그릇의 밥이/ 다 아이들의 몸이 되어가는 순간이다 (중략) 아이들의 밥 위에 구운 갈치 한토막씩 올려놓는다/ 잘 크거라, 나의 몸 나의 生/ 죽는 일이 하나도 억울할 것 같지 않은/ 시간이 맴돌이를 하는 어느 저녁 때다 ?황규관 詩 ‘어느 저녁 때’

엄마 생일이라고 모인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는 남의 손으로 차린 저녁 한 끼 같이 하고 돌아와서는 다음날 점심까지 엄마 밥을 얻어먹었다. 당신 생일인데 당신은 먹지도 않는 온갖 밑반찬을 만들어두고, 미역국도 아닌 해장국거리 장만하고, 생김치 빨갛게 담가두고, 데친 오징어에 절인 무 섞어 칼칼하게 무쳐두고, 다 큰 손주 먹일 우유에 갖가지 과일까지 사두셨다. 엄마 냉장고를 열어보고 기막혀하는 나를 보고 “에미가 다 그렇다”고만 하신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중략)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_ 안도현 詩 ‘스며드는 것’

냉장고는 우리가 떠날 때 엄마 집처럼 다시 텅 비었다. 돌아오는 길에, 겨우 하룻밤이지만 당신 품에서 철부지처럼 웃고 떠드는 나이 많은 자식들 보는 게 엄마는 기뻤을 거라고. 내 멋대로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도 텅 빈 냉장고와 함께 텅 빈 집에 앉아 TV와 친구할 엄마를 떠올리니 ‘꽃게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어하는 알’ 같은 나의 무력함과 무심함에 속이 되게 쓰리다.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21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집밥#엄마밥#스며드는것#안도현#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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