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 생긴 청년들, 4년새 산재 7배 늘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14일 14시 10분


코멘트
사진출처=pixabay
사진출처=pixabay
2019년 3월, 자살예방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입사 5년차의 회사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30대 여성 이영은(가명) 씨의 전화였다. 약 10분간의 통화에서 그는 인사발령으로 새로 맡게 된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성과를 못 내고 있는 데다 실수까지 잦아져 잠도 못 잘만큼 위축돼있다고, 그만두고 싶지만 주변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럴 수 없다고도 했다.

이 씨가 자살예방센터에 전화를 건 날은 토요일이었다. 하지만 통화를 마친지 약 3시간 후인 저녁 6시, 그는 밀린 일을 하러 회사로 향했다. 그러고선 자정에야 퇴근했다. 그렇게 주말에도 출근을 한 지 3주째였다. 1주일 근무시간은 65시간에 달했다. 이튿날 새벽 이 씨는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에는 업무에 대한 부담을 호소하고 자신의 역량을 비관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씨의 죽음은 개인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지난해 3월 근로복지공단은 이 씨의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이 씨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 씨가 연차에 비해 전문성 높은 일을 맡았고, 이에 대한 부담을 호소했지만 회사는 인력배치 등 적절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에 따른 장시간 근로와 업무상 스트레스가 이 씨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14일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의원(비례대표)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20, 30대 청년근로자 144명이 일하다가 정신질병을 얻게 돼 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2016년에는 20명에 불과했는데 4년 사이 7.2배 늘었다. 같은 기간 전 연령대에서 업무상 정신질병 산재 승인건수는 69건에서 376건으로 5.4배 늘었다.

업무상 정신질병을 앓는 청년근로자 144명 중 17명은 이 씨처럼 극단적인 선택으로 사망에 이르렀다. 2019년 극단적인 선택으로 숨져 지난해 산재를 인정받은 20대 여성 박희은(가명)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공공기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지 반년이 된 박 씨는 업무에 대한 극심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다. 육아휴직을 떠난 팀원을 대신할 인력이 충원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업무가 많았지만 팀장과 단 둘이 일해야 했다.

박 씨는 동료직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의 조사에 응한 박 씨의 한 동료는 ‘박 씨는 고졸입사자라 나이가 어렸다. 다른 부서 직원들은 나이가 어린 박 씨의 협조 요청에 잘 응하지 않았고 잡다한 업무를 그에게 미루기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옷차림이 촌스럽다고 지적하는 등 직장 내 괴롭힘을 하는 동료도 있었다. 밝고 활달했던 박 씨는 회사에 가면 떨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서서히 위축됐다. 그는 300자 남짓한 짧은 유서를 쓰며 ‘죄송하다’는 말을 7번 반복했다.

제조업체에서 9개월간 일한 최성훈 씨(가명)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 지난해 산재를 인정받았다. 최 씨의 상사는 일하다가 실수를 한 최 씨를 세워놓고 욕설을 하며 “업계에서 밥 벌어 먹을 생각하지 말라”는 등 폭언을 일삼았다. 최 씨는 자신의 실수로 상사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 2019년 11월, 아내와 딸에게 ‘내가 한심하고 부끄럽다, 미안하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업무상 정신질병 산재는 승인건수와 동시에 신청건수도 늘고 있는 추세다. 2016년 167건에 그쳤던 업무상 정신질병 산재신청은 2017년 190건, 2018년 233건, 2019년 313건, 지난해 561건으로 늘었다. 근로복지공단의 한 관계자는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며 우울감 등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의 질환이라고 보는 시선이 확산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하다 생긴 마음의 병을 조치가 필요한 질병으로 인정받기란 여전히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울증을 개인의 나약함으로 치부해버리는 조직문화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대기업 신입직원이던 김희준(가명) 씨는 육아휴직에 들어간 대리급 직원의 업무를 맡게 되며 많은 업무량에 시달렸다. 일을 제대로 못하면 팀장으로부터 욕설과 폭언을 동반한 공개적인 질책을 받는 등 직장 내 괴롭힘도 당했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김 씨는 퇴사를 결심했다. 하지만 그가 퇴사 의사를 밝히자 팀장은 “네가 편하게 자라 이 정도 일을 힘들다고 한다”며 김 씨를 질책했다. 김 씨는 한 달 후인 2019년 11월 극단적 선택을 했고 지난해 산재가 인정됐다.

김형렬 가톨릭대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개인이 정신질병에 취약한 성격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질병과 업무간 연관성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라며 “장시간 노동과 과도한 업무부담, 다양한 형태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 직업병이라는 인식이 더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송혜미 기자 1a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