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엘리자베스2세 여왕 남편 필립공 별세…“윈저성에서 평화롭게 숨 거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9일 22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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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95)의 남편인 필립 공이 9일(현지 시간) 런던 근교 윈저성에서 사망했다. 향년 100세. 지난달 3일 심장 수술을 받고 퇴원했지만 끝내 숨졌다. 1947년 여왕과 결혼해 74년을 해로한 그는 역대 영국 국왕의 배우자로 살았던 기간이 가장 길었던 인물이다.

왕실은 이날 공식 성명을 통해 “여왕은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을 깊은 슬픔을 담아 알린다. 필립 공이 윈저성에서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제1야당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 등 정계 인사도 애도를 표했다. 둘 사이에는 찰스 왕세자(73), 앤 공주(71), 앤드루 왕자(61), 에드워드 왕자(57) 등 3남 1녀가 있다.

필립공 해군 복무 시절
필립공 해군 복무 시절
여왕과 마찬가지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필립 공은 1921년 그리스에서 태어났다. 그리스, 덴마크, 영국, 러시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1939년 영국 다트머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당시 13세였던 여왕을 처음 만났다. 당시 여왕이 한눈에 그에게 반했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필립 공은 여왕을 ‘양배추(cabbage)’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1940년 영국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둘의 결혼은 쉽지 않았다. 당시 필립 공은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다. 또 그의 누나 넷은 모두 독일 남성과 결혼했는데 매형들이 나치 지지자란 주장이 제기돼 둘의 결혼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셌다. 이에 필립 공은 1947년 초 그리스 왕실 내 직위와 권리를 모두 포기하고 영국인으로 귀화했으며 같은 해 11월 결혼했다. 종교도 성공회로 바꿨고 이름 역시 어머니의 성(姓) 바텐베르크를 영어로 바꾼 ‘마운트배튼’으로 정했다. 자식들이 자신의 성이 아닌 왕가의 성 ‘윈저’를 쓰는 것에 내내 아쉬움을 표했다.

필립공의 왕실 내 위치도 애매했다. 생전 그가 “나는 헌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내 역할의 전례가 없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영국에서는 군주인 여왕의 배우자가 갖는 공식적인 직위가 없다. 그는 군주를 존중하는 의미로 항상 여왕의 세 발자국 뒤에서 걸었고, 왕위 계승자인 아들 찰스 왕자보다 수입도 적었으며 정부 기밀문서 접근도 아들이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가정에서는 가장이었던 그는, 자녀들을 가정교사에게 맡겼던 왕실의 관례를 깨고 학교에 입학시켰다. 아침이면 자신이 직접 계란을 굽고 여왕은 차를 끓이도록 했다. 이는 “아이들에게 평범한 가정 생활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필립 공은 부인이 여왕에 오른 1952년부터 2017년까지 65년간 왕실 공무를 맡았다. 637차례 해외를 방문했고 5500번의 연설을 했으며, 780여 개 단체의 대표 혹은 후원자 역할을 했다.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개막식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직설적이고 즉흥적인 성격, 잦은 실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1984년 케냐를 방문했을 때 현지 여성에게 “여자가 맞느냐”고 했고, 1986년 중국 방문 때 영국인 유학생에게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실눈이 될 수 있다”며 동양인을 비하했다. 수차례 영국의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도 비하했다. 2001년 유명 가수 엘턴 존의 왕실 공연 뒤 감상을 묻자 “마이크를 껐으면 좋겠다”고 혹평했다. 98세였던 2019년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자동차를 몰다가 다른 차량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고령자의 운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자 운전면허를 포기했다.

첫 아들 찰스 왕세자와 필립공
첫 아들 찰스 왕세자와 필립공
필립 공은 여왕보다 앞설 수도 없고 아내 뒤에서 마냥 숨죽여 살 수도 없는 자신의 고충이 크다고 내내 토로했다. 후손도 속을 썩였다. 자식 넷 중 에드워드 왕자를 빼면 모두 이혼 경험이 있다. 1997년 맏며느리 다이애나 왕세자빈(1961~1997)은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올해 초 해리 왕손(37)과 흑백 혼혈인 메건 마클 왕손빈(40)은 왕실과 결별했다. 지난달 왕손 부부가 왕실의 인종차별을 폭로했을 때 그는 입원 중이었다. 당시 왕실은 고령의 그가 충격을 받을까 우려해 인터뷰 내용을 그에게 알리지 않으려 애썼다고 인디펜던트가 전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영국 전역이 록다운 중인 상황에서 장례식도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가디언에 따르면 ‘포스 브리지’(Forth Bridge)라는 코드네임으로 계획된 필립공의 장례식은 당초 수천 명이 참석하고, 런던부터 윈저성까지 수백 명의 군인이 엄호하는 가운데 행진이 이뤄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재 잉글랜드 장례식에는 최대 30명이 참석할 수 있고,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서로 2m 이상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여왕이 로열 패밀리 중 극히 일부만 초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익명의 관계자는 “왕실이 장례식 과정에 절대 군중이 모여들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
파리=김윤종 특파원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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